음모론 속 과학 필라델피아 실험에 대한 폭로는 1956년 1월 대학 수학 및 천문학 강사이자 UFO 저술가였던 모리스 K. 제섭에게 날아든 한 통의 편지로부터 시작됐다. 편지를 보낸 이는 칼 앨런이었는데, 그는 편지에서 제섭에게 통일장이론에 대해 관심을 끊을 것을 권했으며, 그 이론은 1943년 해군에 엘드리지호에서 이미 시험됐다고 주장했다.
또한 칼 앨런은 자신을 필라델피아 실험 당시 노퍽에 있던 앤드루 후루셋호라는 상선에 탑승하고 있다가 갑자기 나타난 엘드리지호를 직접 목격한 선원 중의 한 명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노퍽에 나타났다가 다시 갑자기 사라져버린 엘드리지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묘사했다.
|
▲ 영화 '필라델피아 특명'의 한 장면 | “선체를 감싼 대기가 주위보다 약간 어두워졌고 몇 분 후 자욱한 녹색 안개가 피어 오른 후 엘드리지호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제섭은 난데없는 그 편지가 1955년에 출간된 ‘UFO의 현상들’이라는 자신의 저서를 읽은 독자의 편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음해 초 제섭은 워싱턴의 해군 실험국으로부터 여백마다 누군가가 세 가지 색상의 펜으로 빽빽하게 주석을 달아놓은 자신의 UFO 저서를 받았다.
그 주석의 내용 중에는 필라델피아 실험에 대한 것도 포함돼 있었다. 그 후 이 책은 세 가지 색상의 주석이 그대로 재현된 채 다시 발간됐다. 그러다 1959년 4월 20일 제섭은 자신의 자동차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타살로 짐작할 만한 단서가 전혀 없어서 경찰은 그의 죽음을 자살로 단정 짓고 마무리했다.
그 후 몇몇 작가들에 의해 제섭의 주석이 담긴 책의 내용이 저서에서 언급되다가 1979년에는 필라델피아 실험과 관련해 수집한 내용들을 모은 ‘필라델피아 실험 : 투명실험’이란 책이 출판됐다.
그리고 1980년 10월 페이트(FATE)라는 잡지에서 제섭이 받은 칼 앨런의 편지가 공개되면서 이 사건은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84년 필라델피아 실험 사건은 스튜어트 래필 감독에 의해 ‘필라델피아 특명’이란 영화로 만들어지기에 이르렀다.
삼형제가 모두 실험에 참가
이처럼 사건이 널리 알려지자 필라델피아 실험과 관련된 새로운 증언을 내놓는 이들이 속속 등장했다. 알프레드 빌렉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을 하버드대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폰 노이만 박사의 추천으로 필라델피아 실험에 직접 참여했던 과학자라고 소개했다.
그는 스코틀랜드 에딘버러대에서 역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은 자신의 형 던컨과 해군 수병이자 시험 승무원이었던 자신의 동생 짐과 함께 형제 3명이 모두 필라델피아 2차 실험 때 엘드리지 호에 승선해 직접 실험에 참가했었다고 주장했다.
|
▲ 필라델피아 실험 당시 엘드리지호가 공간이동뿐만 아니라 시간여행까지 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 그에 의하면 형은 실험 중에 실종됐으며, 동생은 배의 갑판과 칸막이 벽 사이에 파묻힌 채 죽었다는 것. 이처럼 사람들이 엘드리지호의 철판에 박힌 채 발견된 것은 공간이동시 초공간 영역이 붕괴되면서 선원들의 시신이 다시 물질화되는 과정에서 분자구조도 이동해 철판 근처에 있을 경우 거기에 박히게 된 것이라는 자기 나름의 과학적 해석을 내놓기까지 했다.
그런데 빌렉은 필라델피아 실험 당시 엘드리지호가 순간적인 공간이동뿐만 아니라 시간여행까지 했다는 놀라운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의 주장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자욱한 녹색 안개가 피어오르면서 배가 보이지 않는 스텔스 기술이 성공했다. 하지만 그때부터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다. 통신은 두절됐고, 전자관에서 작은 번개처럼 고압 전기 아크가 튀었다. 갑판 위에 있던 선원들은 의식을 잃고 미친 듯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배에서 탈출하기 위해 갑판에서 뛰어내리는 순간 물에 첨벙 빠진 게 아니라 긴 터널 속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끝없이 추락했다. 2분쯤 후 정신을 차려 보니 철조망이 쳐진 이상한 군사기지 안이었는데, 군인들이 와서 어떤 건물의 지하로 나를 데려갔다.
그곳에서 자신을 폰노이만 박사라고 소개하는 어떤 늙은이를 만났다. 폰노이만 박사는 내가 대학 때부터 알고 지낸 스승이었는데, 그 사람은 전혀 그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상하다고 느끼는 순간 폰노이만 박사는 그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이곳은 1943년의 필라델피아가 아니라 1983년의 롱아일랜드 몬탁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폰노이만 박사는 그 사실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1943년에는 꿈도 못 꿀 첨단기술들을 직접 보여주었다.
잠시 후 폰노이만 박사는 내게 엘드리지호로 돌아가서 장비를 부숴야만 실험이 멈출 수 있다고 했다. 시간 터널로 다시 들어가 엘드리지호로 돌아와서 도끼를 장비를 부수니 정말로 모든 것이 다시 필라델피아 항구의 원래 위치로 돌아왔다.”
테슬라 뒤를 이은 폰노이만
음모론자들이 주장하는 필라델피아 실험의 첫 책임자는 니콜라 테슬라였다. 그러나 니콜라 테슬라는 자신이 발명한 테슬라 코일이 인간에 적용되는 것을 반대한 끝에 프로젝트에서 축출됐다. 그로부터 10개월 후 그는 호텔방에서 관상동맥 혈전증으로 사망한 채 발견됐다.
이후 그 자리를 대신해 실질적으로 필라델피아 실험을 진두지휘한 이가 바로 빌렉이 말하는 폰 노이만 박사이다. 헝가리 출신의 과학자인 폰 노이만은 1930년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운 조국을 떠나 미국에 정착했다. 헝가리가 나치의 편에 서는 정치적 상황이 싫었기 때문이다.
|
▲ 필라델피아 실험을 진두지휘했다고 알려진 폰 노이만 박사 | 이런 정치적 배경을 지닌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핵폭탄 개발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원자폭탄 모의실험 결과를 빠른 속도로 계산할 수 있는 새로운 컴퓨터 모델을 제시했다.
그것이 바로 요즘 우리가 사용하는 프로그램 내장형 컴퓨터로서, 폰 노이만 방식이라고도 불린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결과로 만들어진 핵폭탄이 1945년 8월 마침내 일본에 투하돼 엄청난 결과를 빚자 거기에 참여한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큰 충격을 받아 핵무기에 대한 반대 입장을 보였다.
하지만 극심한 정치적 혼란을 겪고 조국을 떠난 폰 노이만의 입장은 달랐다. 그는 끝까지 핵폭탄 개발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입장을 보였으며, 수소폭탄 개발 계획에도 참여했다. 어떻게 보면 필라델피아 실험이라는 극단적인 비밀실험과 그의 강한 이미지는 매우 잘 들어맞는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폰 노이만은 빌렉이 엘드리지호로 시간여행을 하면 목격했던 1983년보다 훨씬 이전인 1957년 2월에 이미 암으로 사망했다. 물론 빌렉도 그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그런 주장을 한 것이 1990년이었으니까 말이다.
이에 대해 일부 음모론자들은 폰 노이만이 1957년에 사망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훨씬 나중에까지 살아남아 몬탁 기지에서 비밀리에 피닉스 프로젝트를 계속 추진했을 거라는 억지스런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하편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