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타 모르가나 (外)
정채원
여름에는 내 피로 너를 만들었고
겨울에는 뼛가루로 너를 만들었다
아니,
여름에는 얼음으로 너를 만들었고
겨울에는 모래로, 모래바람으로 너를
만들었다, 되도록 빨리 지워지는 너를
길 잃은 사막에서 쓰러지기 직전 나타나는
신기루 속의 신기루
달려가 잡으면 가시풀 한 줌으로 흩어지는
너를 알면서도
그런 줄 알기에 더 놓지 못했다
철창에 갇혀 온종일 커피 열매만 먹는 사향고양이는
오늘도 피똥 아니, 커피똥을 싼다
수도 없이 창자벽에 제 머리를 박으며
캄캄한 내장 속에서 발효된 내 편지는
차가운 혀를 사로잡을 만큼 중의적일까
하늘에 뜨는 태양과
바다에 뜨는 태양이 서로 마주보며
너, 가짜지?
얼굴을 붉히는 동안
한 걸음 다가가면 두 걸음 뒤로 물러나다
내장을 거칠 겨를도 없이
해가 지면 모든 게 지워지고
주름진 백지만 남게 되더라도
북극 얼음바다 위에 떠 있는 마법의 성을 향해
구절양장을 건너가는 우리에게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오늘은 얼음을 뚫고 뜨거운 커피가 솟구칠지도 모르지
* Fata Morgana : 마녀 모르간 또는 신기루라는 뜻.
제8병동
복숭아나무 아래
붉은 옷을 입고 누워있다
복숭아나무 아래
나 어릴 때 당사주를 보신 엄마는
누워있는 나를 보고 섬뜩하셨다지
그림 속에 누우면 죽는다 했는데
일찍 죽는다 했는데
누워있어도
붉은 옷을 입었으니
죽는 건 아니라 했다지
늘 어딘가 아플 뿐
오른쪽으로 누우면 왼쪽 옆구리가 시리고
바로 누우면 가슴이 막막해
잠 못 들고 뒤척일 때마다
꽃들은 다투어 피어나고
칼은 복숭아나무 가지를 자르고
나를 스쳐 지나가고
비 오듯 쏟아지는 꽃잎 아래
누군가 복숭아나무 곁을 지나며 말하지
잎새가 웅얼거린다고
가지가 자꾸 앓는다고
이따금 노래 소리로 들린다고
천 년 전 강가에서 들었던 그 비파소리라고
한평생 도망쳐도 빠져나올 수 없는 그림 속에서
꽃 없는 엄동에만 나무 곁을 지나는 사람
비 온 뒤 떨어진 꽃잎만을 밟고 가는 사람
단물 흐르는 복숭아를 바구니 가득 따 담는 사람
각기 다른 자기만의 그림 속에서
나는 오늘도 바래진 붉은 옷을 입고
신음하며 누워있다
해마다 천도가 주렁주렁 익어가는 나무 아래
사해, 사해
사막엔 모래만 있는 게 아니다
삭망을 아는 달도 있다
너와 나 사이
타는 모래만 채워져 있는 게 아니다
영하의 밤도 있다
달려오던 전갈은 모래 속으로
재빨리 기호를 숨기고
너도 무엇이 두려운 거니?
무엇을 기다리는 거니? 고도가 되어
사해야 할 그 무엇이 있어
사함 받아야 할 그 무엇이 있어
핑크색 뿔방울뱀 사이드와인더*는
고리처럼 구부린 전신을 모래 위로 내던지며 간다
재빨리 먹잇감에 독니를 꽂는 냉혈은
달빛을 흡혈하는 야행성이다
사막에 던진 신의 물음표
우리는 사해로 전진한다
살아 움직이는 끔찍한 부호를
달빛 모래 바다에 던진 까닭을 묻고 싶다
*sidewinder : 교묘하게 구부린 몸을 옆으로 던지며 이동하는 모습 때문에 붙여진 이름.
뜨거운 모래 위에서 이동하기에 유리하다.
벌레구멍
과거로부터 온 나비가
내 이마에 살풋 앉는 아침
고요한 미열이 있다
두 개의 번개가 동시에 머리 위로 떨어져
사과를 꿰뚫는 구멍이 날 때
보이지 않던 것이 얼핏 보일 때
말랑거리며 머릿속을 관통하는 벌레가 있다
꿰뚫려도 통증을 모르는
피 흘려도 눈을 감지 않는
시간과 공간의 벽을 뚫으며
기차가 달려간다
울지마라 울지마라
사과가 끊임없이 꿈틀거려도
변하지 않는 건 변하지 않는 것
내가 백 년 달아나는 동안
네겐 한 계절이 흘렀다 해도
변하는 건 변하는 것
죽는 건
죽어서도 다시 날아오르는 것
갈 수 있는 끝에서 끝까지
존재하지 않는
터널을 뚫는 것,
아무도 노래하며 지나가지 않는다 해도
축제
온종일 망고를 생각하다
머리끝에서부터 조금씩 불이 붙기 시작한 사람
발은 조금씩 차가워지고
냉기는 발목을 타고 위로 위로
불붙은 머리 속에서
눈동자만 얼음사탕처럼 빛난다
유리처럼 투명한 내화벽을 몸 안에 세우고
불과 얼음은 서로를 노려본다
녹아 흐르는 내부
연기인지 수증기인지 모를 뿌연 풍경 속으로
노란 장화를 신고 걸어가는 너의 뒷모습이
어슴푸레,
망고!
얼레 줄은 이미 다 풀렸다
시 전문지 《포엠포엠》 2018년 가을호
시인 프로필
정채원 / 서울 출생. 이화여대 영문과 졸업. 1996년 《문학사상》 등단. 시집 『나의 키로 건너는 강』 『슬픈 갈릴레이의 마을』 『일교차로 만든 집』.
[제2회 한유성문학상 심사평]
정서적 파동을 감각적 사유로 노래하는 면모
한유성문학상은 ‘송파산대놀이’와 ‘송파다리밟기’라는 우리의 무형문화제를 제정하고 전통을 이어온 서울 송파의 대표적 문화 인물로 인간문화재49호인 한유성 선생을 기리기 위해 지난해 새로 제정되었다. 우리의 무형재산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출발한 한유성문학상은 우리 시단의 미학적 정점들에 대한 정치한 검토와 평가를 통해 지역 사회와 한국 시단 전체를 아우르는 권위 있는 문학적 장(場)을 펼쳐갈 것으로 생각된다. 특별히 제2회 수상자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심사위원들은, 감성과 지성을 통합하여 빛을 발하는 문학적 위의(威儀)를 무게 있게 생각하면서, 매우 깊이 있고 개성적인 미학적 성취를 보여준 시인들의 작품을 천천히 읽어나갔다.
예심을 거쳐온 시인들은 이미 우리 시단을 대표하는 중견들인지라, 각자의 미적 완결성과 위상을 두루 갖춘 분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심사위원들은 이들 작품에 대한 윤독과 토론을 거듭하였는데, 그 결과 시인으로서의 품격, 작품의 균질성과 지속성을 보여온 정채원 시인의 작품들을 수상작으로 선정할 수 있었다.
그동안 정채원 시인은 삶과 죽음의 필연적 길목마다에서 존재의 본질과 거기서 파생하는 정서적 파동을 감각적 사유로 노래하는 면모를 보여왔다. 언어가 사물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스스로 물질성을 가지면서 일종의 존재 생성의 에너지를 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그녀는 극점에서 보여주었다. 때로는 건조하기도 하고 때로는 신비롭기도 한 시인의 목소리는 존재의 평면을 훌쩍 넘어 존재의 심연에 가 닿았고, 한편 환상을 동반하고 한편 끔찍한 실제적 질서를 가다듬는 그녀의 미학적 촉수는 존재의 왜소함을 벗어나 한없는 상상적 확장성을 보여준 바 있다. 이처럼 대상의 심미성과 내면의 활화산 같은 미적 열정을 동시에 수습하려는 시인의 생각과 실천은 우리 시단에 고독하고 서늘한 그녀만의 권역을 형성해왔다고 할 수 있다.
이번에 수상작으로 뽑힌 「파타 모르가나」 외 9편은 삶의 단순한 유한성에서 벗어나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생의 여러 차원을 인식해가는 도정에 들어선 시인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특별히 「파타 모르가나」는 신기루의 속성을 적극 차용하여, 피처럼 뜨겁고 뼈처럼 견고하지만 얼음처럼 모래바람처럼 사라져갈 수밖에 없는 존재의 불가피성을 노래한다. “차가운 혀를 사로잡을 만큼 중의적”인 시인의 사유와 감각은, 모든 것이 지워져도 남을 것은 남고, 우리 삶이 ‘가짜/거짓말’을 넘어 도달하게 될 삶의 실재와 눈부시게 만나게끔 해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 정채원의 대표 시편으로 손색이 없을 것이다. 다른 작품들도 예의 그 강렬한 색감과 살아 움직이는 끔찍한 기호들을 선명한 심상으로 부조하고 있어서, 정채원 시학의 절정감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작품 세계의 일관성과 한결같은 심화 과정에 가볍지 않은 격려가 얹혀야 한다고 심사위원들은 뜻을 모았다. 정채원이라는 이름 앞에 한유성이 겹칠 때 그 순간이 더욱 빛날 것이다. 거듭 수상을 축하드리면서, 정채원 시인만의 언어적 연금술이 지속적 진경으로 거듭 나타나게 되기를, 마음 모아 바라마지 않는다.
심사위원
이건청(시인, 한양대 명예교수, 전 한국시인협회 회장)
박형준(시인, 동국대 교수)
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 교수, 글)
시 전문지 《포엠포엠》 2018년 가을호
-미국최대포털 뉴욕코리아, 문화부 John Kim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