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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박성식 시인의 시집 『그 너머는 끝내 보여주지 않는다』는 자연과 농사일, 일상에서 길어 올린 삶의 진실과 지혜를 노래하며, 욕망을 벗어난 소박한 긍정의 삶을 담담하고도 따뜻하게 그려내 보여주는 시집이다. 시인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물며, 이승과 저승, 현실과 이상, 언어와 침묵의 사이에서 저 너머를 응시하지만 끝내 그것을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그는 지금 여기, 우리의 삶이 머무는 자리에서 발견되는 작고 소박한 것들 그리고 그 너머로 스며드는 빛과 그늘을 시의 언어로 바꾼다.
시인은 자연과 농사일을 통해 삶의 지혜를 배운 사람처럼,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노래한다. 「트다」에서 물꼬를 트고, 담을 헐고, 말을 트고, 바람과 하늘과 바다를 트듯, 시인은 막힘이 없는 삶의 흐름을 추구한다. 그것은 단순히 외부로 향하는 개방이 아니라, 자신 안의 막힌 욕망과 집착을 걷어내며 길을 내는 일이다. 오뉴월 마른논에 물을 대듯, 말과 마음과 세계를 트는 그의 시선은 욕망을 버린 자의 담백한 삶의 태도로 이어진다. 그는 허기와 결핍마저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영구결번」에서는 돌아갈 수 없는 모성과 고향의 부름을 허전한 전화번호 뒤에 숨긴 채, 그리움을 껴안는다. 「느티나무」에서는 나무의 모습을 통해 스스로 자신을 되돌아보며, 한 그루 나무가 되어가는 삶의 완결성을 그리워한다. 그 나무는 꽃피워 자랑하지 않고 열매 맺어 내세우지 않으며, 순하게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다. 시인의 시는 그런 느티나무와 닮았다. 삶을 요란스럽게 드러내기보다 비우고 허물며 거기에서 새로운 너머를 꿈꾼다.
하지만 시인은 초월적인 저 너머의 세상을 구하지 않고 현실 속에서 저 너머의 세상을 찾는다. 하지만 그 너머는 이 시집의 표제작 「너머 2」에서처럼 “끝내 보여주지 않는다.” 유리창 너머, 갯벌 너머, 마니산 노을 너머로 아득히 스며드는 빛과 그림자는 있지만, 그것을 붙잡을 수는 없다. 대신 그는 그 너머를 향한 질문을 남긴다. 「무자無字경전」에서는 목련 꽃그늘 아래에서 언어로 닿을 수 없는 절정의 순간을 묻고, 「쑥부쟁이」에서는 길섶의 작은 꽃에게 삶의 까닭을 묻는다. 시인은 저 너머의 진실을 드러내기보다 그 물음 자체를 소중히 여긴다. 그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뚜렷이 나누지 않는다. 「겨울 움 돋은 숲」에서는 삭정이로, 땔나무로, 흙으로 돌아가는 자연의 섭리를 노래하며, 삶과 죽음이 하나의 순환임을 보여준다.
이 시집의 가장 큰 미덕은 참신하고 생생한 이미지에 있다. 그의 시는 구체적 이미지로 독자의 감각을 일깨우며, 그 이미지 속에 삶의 철학과 감정을 촘촘히 새겨 놓는다. 예를 들어 「한파 예보」에서는 “살은 삭고 껍데기는 쪼그라져” 있는 황태의 이미지를 어머니의 손길에 빗대어 따뜻하고 절절한 삶의 체취로 바꿔 보여준다. 또한, 「겨울 움 돋은 숲」의 나무 이미지가 아주 잘 묘사되어 있다. 시인은 여기서 나무가 서서 생을 마치거나 땔감이 되어 누워, 지난 계절의 뜨거운 태양과 생명을 다시 한번 연료 삼아 불을 피우는 모습을 그려 보여준다. 이 이미지는 마른나무 조각조차도 마지막으로 누군가의 저녁밥을 짓는 불씨가 되며 자기 존재를 다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며 이는 소박하면서도 경건한 죽음의 철학을 담고 있다.
이 시집 『그 너머는 끝내 보여주지 않는다』는 언어로는 끝내 다 닿을 수 없는 삶의 진실을 향해, 그러나 언어로써 최대한의 다가섬을 시도한 시집이다. 그의 시를 읽는 일은 바로 그 다가섬의 길을 함께 걷는 일이 된다. 욕망을 비우고, 삶을 긍정하며, 묵묵히 그 너머를 응시하는 일. 이 시집은 그 길을 오래도록 독자의 가슴에 남긴다.
시인의 말
시를 쓰고 싶었지만
배가 고플 것이라 했습니다
생각은 여름철 구름 같으나
글은 묵은 볼펜처럼 굳었습니다
모든 현상은 점점 더
복잡한 쪽으로 흘러간다고 하지만
월정사 전나무 길이나
소광리 소나무 숲을 꿈꾸는 것은
오롯이 자기의 몫
삶에 대한 감사와
자신을 향한 위로와
어둠을 더듬는 간절한 물음으로
시집 속으로
적요를 밀고 들어서자
왈칵 쏟아져 내리는 한낮
마당이 환했다
-「분홍낮달맞이꽃」부분
지난 이야기 묻지 않아도 그을린 긴 목덜미에
그해 칠월같이 푸른 모습 희미하게
덧니 드러내며 서 있을지도 몰라
-「넘어 굽어들면 후포」부분
심부름하듯, 어디 하룻밤 나들이나 가는 것처럼
“아버지,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마루에서 대문까지」부분
얼었다 녹고 젖었다 마르고
살은 삭고 껍데기는 쪼그라져
어머니 손길처럼 풀어진 황태
-「한파 예보」부분
동네 꽃 얻어다 뜨락 꾸며놓고
봄은 여름같이 여름은 또
가을인 듯 바라보며
그래 그대로 한 송이
꽃이었던
-「도라지꽃」부분
성긴 눈발 헤집고 대문 앞까지 따라오는
젖내 아련한 목소리
-「영구결번」부분
몸이 닫히고
마음이 열린
그 틈 사이로
-「틈」 부분
중심을 앞으로 실어 한 걸음 내딛는 순간
허공을 밟는 느낌이 이런 것인가?
아, 이게 아닌데
-「죄와 벌」 부분
이 마음이 꽃이니
이 몸을 빌려 꽃답게 피었으니
아서라 두어라
땅속에서 십수 년 굼벵이로 기었어도
귀동냥 눈동냥으로나마
이 세상에 건너온 뜻
한나절 긴 울음으로 울어보리니
-「울음꽃, 매미」 부분
어둠은 빛을 낳고
고요는 소리를 잠재우니
어둠과 고요는 숨겨놓은 문
세상의 비밀은 얼마나 검은지
우리가 아는 깊이는 어디까지인지
-「이명 」 부분
지금 노란 꽃의 뒤를 캐고 있는
나의 배후는 또 누구인가
나를 살고 있는 그는
-「자화상」 부분
겉보기는 모두 그럴듯해도
한입 베어 문 혓바닥에서 갈리는
황홀과 배신
-「복숭아」 부분
그 너머는 끝내 보여주지 않는다
그림을 버린 액자 속에서도
눈으로는 끝내 보여주지 않는다
-「너머 2」 부분
사는 게 젖은 구두 신은 듯
엎어진 운동화 밟은 듯
마뜩잖고 시들해진 여름 끝물
달이 이울도록 이름 석 자하고 대작하다가
-「송정 바다」 부분
차례
1부 그해 칠월같이 푸른 모습
분홍낮달맞이꽃/ 상군 김유생/ 그런 꿈 하나쯤/ 조청고추장/ 넘어 굽어들면 후포/
한식구/ 소나기 1/ 청명/ 먹먹함에 대하여/ 마루에서 대문까지/ 하관/ 동짓달 초이레/
삼우/ 한파 예보/ 도라지꽃/ 영구결번
2부 가지 사이로 시간이 지나간 자리
틈/ 죄와 벌/ 트다/ 전원문답/ 겨울 움 돋은 숲/ 그 나무, 절뚝이며 건너갔다/
영원한 섬, 그래도/ 울음꽃, 매미/ 이명/ 자화상/ 그땐 그랬다/ 길 2/
농한기/ 늘인국시/ 복숭아/ 풀꽃
3부 서북 하늘에 흩어지는 비행구름
인연/ 꽃반지/ 사랑/ 축도/ 봄 1/ 보리포구/ 봄 한 송이/ 청명과 곡우 사이/
입춘 통신/ 흐르는 강물 같은/ 지진/ 자각몽/가을/ 바위/ 우리 동네/ 겨울
4부 낮달은 저만치 빈 가지에 걸렸는데
길 4/ 붉은 것들의 뿌리/ 손맛/ 존재와 소유/ 더하기 빼기/ 꽃인사/ 너머 2/ 무화과잎/
상담역/ 향/ 쑥부쟁이/ 개똥 한 무더기/ 그림자/ 송정 바다/ 느티나무/ 무자無字경전
해설 _ 유토피아 넘어 보이지 않는 세계를 향하여
우대식(시인)
해설 중에서

박성식의 시집 『그 너머는 끝내 보여주지 않는다』는 전통 서정을 바탕으로 많은 서사를 담고 있다.
이 시집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노동하는 인간 군상에 대한 시적 화자의 시선이었다. 적어도 노동으로 한 생을 다한 존재들이야말로 참된 가치를 지닌다는 인식이 시집 전편에 깔려 있다.
전통적인 서정을 바탕으로 공동체 복원의 욕망을 보여주기도 하고 그를 위해 지역 방언을 적극적으로 이 서사의 출처는 시인 자신이 살아온 내력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육화된 형상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점은 시집 전체를 하나의 유기적 실체로 묶어내는 역할을 한다.활용하기도 하였다. 어머니를 위시한 가족에 대한 따듯한 시선도 큰 의미에서는 공동체의 복원과 관련이 있었다. 또한 보다 근원적은 나는 누구인가의 물음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이 시집에서 주목해야 할 다른 것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라 할 수 있다. 어쩌면 모든 예술가들에게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최초이자 최후의 과제라 해도 무방할 터이다.
산수유를 바라본다
꽃눈이 터진 사이로
꼼지락거리는 그 무엇
검은 흙 속에서 물 뽑아 올리고
스치는 바람 속에서 빛을 그러모아
껍질 찢고 비어져 나오는
저것은 무엇인가
이쪽도 저쪽도 아닌
안과 밖 구분 없이
봄 식탁 전채요리같이
슬픈 듯 모호하고 꿈같이 흐릿하게
이름 이전 존재를
봄 멀미처럼 노랗게 게워내는
저 행위의 연출가는 누구인가
이 순간 뜰에서 봄을 들여다보는
어제와 내일 사이에 아지랑이처럼 걸쳐 있는
나는 누구인가
지금 노란 꽃의 뒤를 캐고 있는
나의 배후는 또 누구인가
나를 살고 있는 그는
- 「자화상」 전문
“산수유를 바라”보며 시적 화자가 주목하는 것은 터진 꽃눈이 아니라 비가시적 세계로서의 산수유의 육체성이다. 생명을 잉태하는 과정으로서 “물 뽑아 올리고” “빛은 그러”모으는 비의시적 운동성에 대한 주목은 보다 근원적인 사고를 동반한다는 점에서 철학적이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안과 밖 구분”이 없다는 인식은 근대적 주체로서의 합리성과는 거리가 멀다. 구성된 합리성으로서의 현실에 대해 예술은 부단히 비판을 가해온 것도 사실이다. 보이는 것만이 이 세계의 전체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인지는 세계를 보는 다른 눈을 제공한다. “모호하고” “흐릿하”다는 전제는 바로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재단할 수 없는 세계의 한 단면이다. “저 행위의 연출가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신을 연상케 한다는 점에서 보다 근원적인 사유를 동반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필연적으로 “나는 누구인가”의 물음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나를 의심하여 “나의 배후는 또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나를 살고 있는 그”가 최후의 내가 아니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자화상의 이름은 시인은 세계의 존재 양상과 자아의 실제에 대해 회의하고 질문하게 된다. 들뢰즈 방식으로 말하면 감각만 될 뿐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실체에 대해 사유하게 된 것이다. 다른 시에서 “내 밖에 서 있는 나”(「그림자」 부분)라고 스스로 규정하듯 분열된 나는 이제 끝없이 ‘나는 나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 시를 쓰는 또 다른 과정이 될 터이다.
박성식의 시는 시적 단련을 통해 각 편의 완결성이 매우 뛰어났다고 할 수 있다. 전통적인 서정을 바탕으로 공동체 복원의 욕망을 보여주기도 하고 그를 위해 지역 방언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어머니를 위시한 가족에 대한 따듯한 시선도 큰 의미에서는 공동체의 복원과 관련이 있었다. 또한 보다 근원적은 나는 누구인가의 물음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이 물음은 그의 시를 보다 철학적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이 부분은 앞의 시적 탐구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문제 제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 너머는 끝내 보여주지 않는다/그림을 버린 액자 속에서도/눈으로는 끝내 보여주지 않는다”(「너머 2」 부분). 이 보이지 않는 세계를 찾아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시인 스스로 제시한 시적 과제임에 분명할 터이다.
해설 _ 우대식(시인)
저자 약력
박성식
동란 막바지 마른 산골에서 태어나 기댈 곳 없는 삶 속에서 먼 수평선을 꿈꾸다가, 뒤늦게 취미 소일로 누룩 디뎌 술 빚고 나무 다듬어 가구도 만들어 보다가, 모래 구덩이에 고이는 물처럼 기억에 스며든 허튼 생각들을 뒤적거려보고 있는 중. 시집으로 『그 너머는 끝내 보여주지 않는다』가 있다.
pss3100@daum.net
박성식 시집 그 너머는 끝내 보여주지 않는다
상상인 시인선 075 | 2025년 7월 8일 발간 | 정가 12,000원 | 128*205 | 132쪽
ISBN 979-11-93093-52-8(0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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