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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문혜정 시인의 시집 『달을 넘어 깊은 바람 속으로』는 삶의 고통과 상처를 언어로 어루만지며 자연의 숨결 속에서 치유의 가능성을 찾는 시적 여정이다. 이 시집은 죽음과 생명, 기다림과 그리움, 상처와 치유라는 추상적 개념을 회화적 언어를 통한 생생한 구체성으로 보여준다. 이 시집의 시들은 말이며 그림이며, 또한 생명의 회복력을 믿는 기도문이기도 하다.
시인은 자연의 구체적이고 생생한 이미지를 통해 삶의 고통과 그것을 견디는 인내의 힘을 그려낸다. 「여백에 누워」에서 거미가 대추나무 끝에 집을 짓는 장면은 씨줄과 날줄이 교차하는 세심한 묘사 속에 삶의 고단함을 투영하며, 폭우를 견딘 거미의 모습은 모든 생명의 삶의 고투를 대변한다. 「장미로 핀 새 한 마리」에선 병약한 새의 죽음을 장미꽃 곁에 묻으며 죽음이 생명으로 환생하는 신화를 꿈꾼다. 장미는 날개를 단 듯 보랏빛 웃음을 터뜨리며 아픔 위에 피어난 생명의 기적으로 그려진다.
또한, 이 시집의 시들은 자연의 생명력이 지닌 치유의 힘을 노래한다. 「묵정밭은 식물도감」에서는 잡초라 불린 것들이 “읽히지 못한 문장들”로 형상화된다. 외면받은 생명들이 언젠가는 읽히고 이해되기를 바라는 시적 기도가 깃들어 있다. 「마당 활짝 열고 기다리는 집」에선 피지 못한 것들을 기다리려 하는 안타까움을 생각하며 기다림이야말로 삶의 진정한 꽃임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죽음과 생명의 경계에서 피어난 이런 기도의 목소리는 「폐사지」에서도 두드러진다. 무너진 절터 위에 바람과 풀꽃이 천수경을 독송하고, 적막이 설법을 대신하는 장면은 상실조차 기도와 환생의 자리로 바꿔 놓는다. 표제시 「달을 넘어 깊은 바람 속으로」의 부석사 풍경은 욕망을 내려놓은 자에게만 열리는 구도의 세계를 상징한다. 시인은 그 세계를 독자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시가 이런 경지로 나아가는 기도문이고 주문이길 바라고 있다.
문혜정 시인의 시들은 침묵 속에서 가장 많은 말을 한다. 「나비의 침묵이 꽃의 문장 속으로」에서 나비의 침묵이 꽃의 언어로 스며들고, 그 침묵은 봄을 흔들어 깨우는 힘이 된다. 그의 시어는 회화적이면서도 감각적 경험을 제공하며, 「눈 내리는 밤에 장미를 그리다」의 “폭설이 겨울의 문장 속으로 들어와 앉는다”는 구절처럼 시와 그림, 소리와 침묵이 하나가 된다. 이 침묵 속에서 문혜정 시인의 시들은 지나간 시간을 기억의 문신처럼 새긴다. 「달이 차오르던 우물집」에서 엄마의 발자국과 그 안에 담긴 고단한 사랑은 삶의 흔적으로 남아 독자에게 뭉근한 울림을 준다.
이 시집 『달을 넘어 깊은 바람 속으로』는 자연과 삶, 죽음과 치유의 긴장 속에서 언어의 가능성을 극대화한 시집이다. 시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와 생명의 슬픔을 언어로 붙들어 그림처럼 펼쳐 보인다. 그 언어는 회화처럼 생생하며 기도처럼 깊고 고요하다. 이 시집을 읽는다는 것은 삶의 고통을 응시하고 그 안에서 생명과 치유의 기적을 목도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우리 안에 깃든 가장 숭고한 기도에 귀 기울이는 일이기도 하다. 침묵과 떨림 속에서 피어난 한 송이 장미꽃 같은 문혜정 시인의 시어는 독자들에게 삶의 허무와 고통을 견디게 하는 치유의 힘을 선물한다
시인의 말
달이 차오르던 밤에
함께 걷지 못했습니다
나는 아마
침묵 속에서 가장 많은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시를 짓는 시간
기다림도 안부가 되었습니다
2025년 7월
봄내에서, 문혜정
시집 속으로
핏빛으로 번진 10월의 장미
기도의 끝에서 피어났다
기도는 생이 못다 건넌 다리를
대신 건너고 있는 중이다
-「10월을 타고 흐르는 장미」 부분
등 굽은 바람의 아쟁 소리 들으며
한겨울 햇살 아래서 졸고 있는 고양이가
짧아진 해를 붙잡고 있다
-「겨울을 지나는 발자국들」 부분
어떤 이에게는 책상이, 세계를 여는 문
그녀에게 책상은 어떤 의미였을까
누군가에겐 너무 당연한 것들이
다른 누군가에겐 한 번도 누려보지 못한 꿈이었다
-「그녀에게 없는 책상 」 부분
함께 걷지 못한 이에게도
저녁은 똑같이 내려앉고 있었다
-「어느 시간이 바람길로 흘러」 부분
오래된 풍경도 미라처럼 변했다
상처의 행간이 쌓여 유물이 되어 가고 있었다
-「가라앉은 기도」 부분
포근함을 품고 내리는 밤이 깊어지자
달과 별이 숨어 버리고
폭설이 겨울의 문장 속으로 조용히 들어와 앉는다
-「눈 내리는 밤에 장미를 그리다」 부분
묘약 같은 신비스러움
껍질을 벗고 싹을 틔운 날
간절한 기도로 꽃대를 밀어 올린다
-「씨앗 속 비밀」 부분
7월의 한낮
꽃대처럼 밀고 올라오는 긴 한숨
삶은 피는 것보다
기다리는 쪽에 더 많은 뿌리가 나는 것 같다
-「마당 활짝 열고 기다리는 집」 부분
잡초라 불린 것들은
읽히지 못한 문장들
-「묵정밭은 식물도감」 부분
꿈이 잠든 날에는
솜사탕같이 달콤하게 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있다
문장이 있다
-「후, 거품을 불면 그날의 웃음소리 들려요」 부분
산등성 아래 작은 잔디장이 엄마의 집이 되던 날
별들이 넘나드는 산등성엔
밤마다 은하수가 그리움처럼 쏟아지고
-「별꽃 가득한 빈집」 부분
봉투 속에 잠자고 있는 시의 씨앗
뿌려 놓은 씨앗들이 묵정밭을 가득 채웠다
-「시의 씨앗이 은유의 문장에 뿌려져」 부분
공갈빵처럼 푹 꺼져 내린 자리
하늘에 닿을 듯 솟아 있는 봉우리에 달이 차오를 때면
파미르고원의 눈표범이 신비스러운 모습으로
비밀문자를 새겨 놓고 있다
-「파블로바」 부분
장맛으로 집안의 길흉을 점치기도 했었다
어머니의 사랑처럼 익어가는
항아리 속 깊은 맛은 언제나
길吉이었다
-「항아리 속 유물」 부분
차례
1부 폭설이 겨울의 문장 속으로
여백에 누워/ 10월을 타고 흐르는 장미/ 길 잃고 서성이는 그림자/ 겨울을 지나는 발자국들/그녀에게 없는 책상/ 어느 시간이 바람길로 흘러/ 흔적을 읽는 시간/ 가라앉은 기도/
길 위에서 지워진 이름/ 노을빛 만장/ 눈 내리는 밤에 장미를 그리다/ 헛배 부른 눈칫밥/
다락방 만월/ 다시 피는 모란/ 씨앗 속 비밀/ 어떤 울음은 별이 되고
2부 푸른 날갯짓으로 수신되어 오던 날들
깃털 위에 내리는 비의 무게/ 마당 활짝 열고 기다리는 집/ 대바지강, 그 큰 울음 /
지지 않는 긴 잠/ 모란동백/ 기억이 환하게 부르는 자리/ 무채색을 입은 겨울/
묵정밭은 식물도감/ 허기와 취기 사이/ 바람의 넋/ 달을 넘어 깊은 바람 속으/
후, 거품을 불면 그날의 웃음소리 들려요/ 사과의 반란 / 장미로 핀 새 한 마리/
손금 안의 도시/ 배냇저고리/ 별꽃 가득한 빈집
3부 꽃 두럭 사이를 사뿐히 넘는 걸음
시의 씨앗이 은유의 문장에 뿌려져/ 그 골목엔 아직 국물이 뜨겁다/ 길과 신발의 방정식
실크로드, 달빛의 길/ 아침이 침묵하는 이유/ 강가 세탁소/ 달이 차오르던 우물집/
누가 그 바퀴를 밀어줄까/ 바람의 이름으로/ 라라의 테마가 서 있는 곳/ 계절의 경계가 무너지다/ 그날, 장미를 열차에 태웠다/ 꽃 두럭 사이를 건너/ 오렌지 감탄사
4부 풍경이 어둠의 깊이로 매달려
폐사지/ 정림사지에서 시간을 만나다 / 어디에서든 꽃은 핀다/ 누가 저무는 이름을 불러/
차마고도/ 도달할 수 없는 울음/ 나비의 침묵이 꽃의 문장 속으로/ 터널 속에서/ 파블로바/핫브레이크/ 항아리 속 유물/ 소나무에 전하는 온기/ 한계령을 넘는 구름이 보이시나요/
저녁 강을 건너는 사람/ 숨을 켜고 듣는 아버지의 노래/ 안개로 박음질된 시간/ 풍경소리
저자 약력
문혜정
『한맥문학』신인상 등단(2022년)
시집 『달을 넘어 깊은 바람 속으로』
전국여성환경백일장 장원
강원대학교 평생교육원 문예창작과 수료
춘천문인협회, 강원여성문인협회, 춘천여성문인협회, 시울림 회원
서울지하철 시공모전 수상(2023년)
moonhj1008@daum.net
문혜정 시집 달을 넘어 깊은 바람 속으로
상상인 시인선 074 | 2025년 7월 7일 발간 | 정가 12,000원 | 128*205 | 132쪽
ISBN 979-11-93093-23-8(0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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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도서는 2025년 강원특별자치도, 강원문화재단 후원으로 발간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