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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박봉준의 시집 『참, 말이 많습니다』는 제목에서부터 삶과 죽음, 말과 침묵 사이의 긴장 상태를 드러낸다. 표제작이라 볼 수 있는 「소란스러운 봄」은 겉보기에 명랑하고 활력 넘치는 계절의 풍경을 묘사하면서도, 그 소란 속에 깃든 불안과 종말의 기미를 끌어낸다. 벚나무의 ‘순산’, 손주의 갑작스러운 언어 폭발, 삐약거리는 병아리의 울음 등은 모두 ‘생명 탄생의 소란함’을 그리지만, 그것은 오히려 “삶이 언젠가 닿을 마지막을 예감하고 있는 자”의 시선처럼 읽힌다. 이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이 ‘말 많은 봄’은 생명의 번성을 표현한 말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 어쩔 수 없이 다가올 소멸에 대한 예감이기도 하다.
이 시집의 첫 작품인 「당신은 지금 몇 시입니까」는 시간의 윤곽을 감각적으로 다룬 작품이다. 시계의 초침은 군기 잡힌 훈련병처럼 똑딱이며, “죽은 사람들에겐 들리지 않는” 소리로 존재를 증명한다. 그러나 시계는 또한 “심폐소생술을 받은” 존재로 묘사되며, 생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자의 비유로 자리 잡는다. 시인은 “폐기물 수거함에 /시계를 버리면 시간의 굴레에서/벗어날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다. 죽음이 시간의 종언이라면, 살아 있음이란 끊임없이 그 소리를 듣고 있는 상태다. 박봉준의 시는 그 고통스러운 시간 청취의 과정을, 담담한 시적 진술로 그려낸다.
박봉준 시인의 시 세계는 인간 중심적 시각을 넘어, 모든 약자들의 고통을 응시한다. 「고로쇠나무의 수난기」에서 우리는 인간의 폭력 앞에 무력한 식물의 고통을 마주한다. 봄이 오는 길목, 나무는 “신음조차 내지 못한 채” 수액을 빼앗기고, 그 존재는 “죽지 않을 만큼 남겨진 목숨으로 살아서/다시 쓸개를 채취당하고/피를 빨려야 하는” 존재로 환원된다. 시인은 이 식물적 고통 속에 인간의 비극까지 투사시키며, “누가 저 악의 손모가지를/끊어라”고 외친다. 이는 단순한 생태 시가 아니라, 죽음을 초래하는 구조에 대한 윤리적 고발이다.
삶과 죽음 사이의 윤리적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작품으로 「벚꽃 밥상」과 「어떡하지」를 들 수 있다. 「벚꽃 밥상」에서는 “만약에 내가 먼저 이승을 떠나면/이 쓸쓸한 홀아비 친구의 문상을/가지 못하는 미안한 일이 생길지도 모를” 미래의 죽음을 상상하며, 살아 있을 때 밥을 함께 나누는 따뜻한 순간이 강조된다. 이 순간의 따뜻함은 ‘죽음 이후’보다 더 본질적인 인간 관계의 증거로 제시된다. 「폐타이어의 노후」는 소모된 사물의 형상을 빌려 인간의 노년과 소멸을 우의적으로 드러낸다. 그들은 한때 “거침없이 질주하던” 존재였지만, 이제 “기침 소리처럼” 삐딱하게 고개를 내민다. 박 시인의 시선은 항상 퇴락과 쇠잔의 끝자락에 머물며, 그곳에서도 꺼지지 않는 체온과 말의 숨결을 길어 올린다.
4부 「아야진」 연작은 죽음 대신 귀향을 다룬다. 그러나 이 귀향은 단순한 회귀가 아니라, “다시 바닷가 사람이 되었다”는 말처럼, 낡고 생경한 정체성의 복귀다. “몰개바람이 자주 짐승 울음소리를 냈다”는 표현은 고향이 죽음의 공간이자 탄생의 공간이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박봉준의 『참, 말이 많습니다』의 시들은 생명의 분주함 속에서 오히려 죽음의 기미를 읽고, 그 죽음을 말로 견디려는 존재들의 허약하면서도 끈질긴 의지에 주목한다. 표제작 「소란스러운 봄」은 그런 의미에서, 삶의 시작과 끝, 탄생과 소멸이 한데 섞인 복합적인 감정의 집약이다. 시집의 제목은 그 자체로 생의 선언이자 죽음의 응시다. “참, 말이 많습니다”라는 고백은, 결국 살아 있음의 가장 분명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 시집은 그 증거를, 마지막 말이 끊기기 전까지 치열하게 기록하고자 한다.
시인의 말
말의 씨앗이 처음 나에게 와서 뿌리내리고 잎을 피우는 동안 행복했다. 이제 내 詩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건 詩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시집 속으로
시계는 가끔 품속에 저장한 시간을 꺼내
색깔을 맛보기도 합니다
현재와 과거는 오로지 그의 가냘픈 손에 달렸지요
사실 저 시계는 오늘 심폐소생술을 받았는데 시계 소리가 내 심장의 고동 소리 같습니다
-「당신은 지금 몇 시입니까」 부분
죽지 않을 만큼 남겨진 목숨으로 살아서
다시 쓸개를 채취당하고
피를 빨려야 하는
누가 저 악의 손모가지를
끊어라
-「고로쇠나무의 수난기」 부분
봄에 태어나는 햇것들은
참, 말이 많습니다
-「소란스러운 봄」 부분
바람이 할퀴고 간 상처를
바람이 어루만지는 하늘이 푸르다
나도 한때는 내 속의 열기를 다스리지 못해 비틀거린 적이 있었다
-「바람으로 흔드는 바람」 부분
갯바람이 그 뻔한 상처에 염을 치는 날이면 꺼이꺼이 짐승 울음을 울던 함경도 아바이들은 해진 틈새
가 아물 날이 없었다
-「아바이마을 아마이 」 부분
나는 평생
달의 뒷면이 어떤 모습일까
궁금한 적이 없다
슈퍼문이라도 뜨는 날 기껏해야 계수나무나 토끼가 잘 있는지 고요의 바다에서는 혹시라도 풍랑이
일고 있는지 수상한 눈으로 바라볼 뿐
-「달의 뒤편 」 부분
폐지공장에 팔려 가도
환생하는 책을 보면 잘린다고 모두
죽는 건 아니다
-「쫓겨나는 책 」 부분
그런 아버지들은 산더미 같은 파도가 덮치면 파도에 배를 맡겨야 목숨을 부지한다는 것을, 파도에
맞서면 칠흑 같은 바닷속에 귀신도 모르게 침몰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해무海霧」 부분
생각이 잠깐 은행나무를 스치자
노란 나비 떼들이 우수수
날아올랐다
-「가을 우체국」 부분
영원한 것은 없다 소멸하는 별들이 지난밤에도 마지막 불꽃을 태우며 사선을 그었다
-「폐타이어의 노후」 부분
끝없이 파도의 구애를 거부하는 것 같아도
모래는 제 몸 안에 울음을
가두고 산다
-「아야진 7 -봉이재」 부분
포구에서는 목숨이 있는 것들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방파제에 갇힌 항구는
이제 물고기들의 신음조차 들리지 않는
수중 무덤
-「아야진 17 -사라지는 포구」 부분
그러고 보면 변하지 않는 것은 바다밖에 없다 저 불통의 고집에 가끔은 화가 났지만 기특하기도 하다
-「아야진 18 -갯바람이 부는 날」 부분
차례
1부 질주하는 것들은 새의 영혼까지 지우고
감자가 싹이 나서/ 당신은 지금 몇 시입니까/ 고로쇠나무의 수난기/ 소란스러운 봄/
바람으로 흔드는 바람/ 아바이마을 아마이/ 새들의 죽음에 관한 보고/
어디 소리 안 나는 총 없을까요/ 저물지 않는 풍경/달의 뒤편/ 신발이 죄인이다/
한 움큼의 죽음/ 부딪칠 수 없는 잔/ 쫓겨나는 책/ 태풍의 경로를 읽다/ 하지 무렵
2부 노란 나비 떼들이 우수수 날아
가을 우체국/ 해무海霧/ 노가리 까다/ 로얄슈퍼를 지키는 풍경/ 호모사피엔스의 발자국/
벚꽃 밥상/ 본전/ 부딪쳐 고이는 소리/ 피사체被寫體/ 퍼즐엄마/ 자아도취/ 하늘에 오르는 사람들/ 콩국수 한 그릇/ 첫사랑 멍게/ 옥수수밭에 바람이 불면/ 설악대교에서 청초호를 바라보는 풍경
3부 낮은 곳으로 고이는 소리
도시를 유영하는 고래/ 폐타이어의 노후/ 섬이 된 갈매기/ 맹랑한 목련/ 명함을 버리다/
빙하가 녹으면 혹시라도/ 무병無病/ 어떡하지/ 품에 고이는 소리/ 야양 사람이 될 뻔/
어싱earthing/ 지루한 영화/ 봄을 내리는 폭설/ 신선대에 오르다/ 갯배를 기다리는 바다/
3월 대설/ 개똥이 아버지
4부 등대가 가물거리는 거기 해안가
아야진 4/ 아야진 5/ 아야진 6/ 아야진 7/ 아야진 8/ 아야진/ 아야진 10/
아야진 11/ 아야진 12/ 아야진 13/ 아야진 14/ 아야진 15/ 아야진 17/
아야진 18/ 아야진 19/ 아야진 20/ 아야진 21/ 아야진 23
발문 _ 삼십팔만 킬로미터 허공 밖의 피울음소리를 듣다 127
고형렬
발문 중에서

숨어서 멀리 물밑을 비추는 박봉준의 시는 아야진 등대 같다고 말하고 싶다. 고향의 등대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열병으로 펄펄 끓던” “비 오는” 아야진 “밤”이 그의 왼쪽 심장 속에서 그를 끝없이 호명했다. 그 등대 불빛이 사나운 파도 사이로 스쳐 지나간다. 친구가 출향하여 방황할 때 어디서나 고향의 내부를 깊이 살피고 어루만졌다는 것은 놀랍고 뿌듯하다.
시가 물론 결의 아름다움을 지녀야 하지만 현상의 본질에 다가갈 때 불인不忍하고 자책하며 자기 형식을 파괴할 수도 있다. 박봉준 시인은 진보적 형식을 수직으로 착공鑿空하여 울음 우는 우물을 지상으로 올렸다. 살아내느라 에둘러 갈 시간과 쉼이 없었다. 그 우물 속에 그의 생의 바람이 지나가고 별이 지나간 뒤에 동해 중부의 가장 아름다운 아야진항의 아침이 밝아온다.
오늘 아야진에 와서
며칠 몸져누웠다 나온 바다를 만났다
바다가 우리 아버지 같아서
한참 바라보고 있으면
눈물이 난다
- 「아야진 5」 부분
양평에서 눈물이 걸린 친구의 얼굴을 바라본다. 반과산을 오르던 두보의 벙거지 눈가에 햇살이 반짝이는 것이 시고詩苦가 아니었으랴. 친구의 시처럼 “그러고 보면 변하지 않는 것은 바다밖에 없다”(「아야진」 18 부분). “대설이 내리면 봄 냄새가”(「3월 대설」) 나는 중앙극장이 있던 그 속초관광수산시장 옛길에서 지루하게 귀가하던 그의 옛 학창을 만날 것이다. 우리도 그 아버지의 시대를 지나갔다. 시인이여, 일진광풍一陣狂風 속으로 우리를 데려가자. _고형렬
저자 약력
박봉준
· 2004년 『시와비평』 등단
· 시집 『입술에 먼저 붙는 말』 『단 한 번을 위한 변명』(국립장애인도서관 대체자료목록 선정)
『참, 말이 많습니다』
· 두레문학상, 제42회 강원문학상, 제61회 강원사랑시화전 최우수상
· 한국천주교주교회 『경향잡지』 수필 연재(2021)
· 강원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2018, 2025)
· 현재 강원고성신문 금강칼럼 위원
qkek1165@hanmail.net
박봉준 시집 참, 말이 많습니다
상상인 시선 063 | 2025년 6월 30일 발간 | 정가 12,000원 | 128*205 | 144쪽
ISBN 979-11-93093-99-3(0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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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도서는 2025년 강원특별자치도, 강원문화재단 후원으로 발간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