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소개
도복희 시인의 시집 『꿈꾸는 세상에는 조팝꽃이 피었다』의 시들은 상실의 고통과 그에 따른 그리움의 깊이가 만든 내밀한 정서를 안온하지만 쓸쓸한 서정적인 언어로 빚어낸다.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사라짐과 헤어짐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꿈과 그리움으로 승화한다.
이를테면 「해 질 무렵처럼 지내고 있어」는 삶이 남긴 깊은 상처를 인정하고 내려놓음으로써 살아가는 법을 배워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기대하지 않는 법도 외로우면 외로운 대로 사는 법도 배웠다”는 시구는 상실 후에도 삶이 계속된다는 깨달음을 담담한 어조로 전달한다. 「오늘의 세시는 당신 없이 지나갔지만」에서 화자는 막연한 기다림을 신화적이고 역사적인 여정에 비유하여 끝나지 않을 그리움을 이야기한다. 시간은 지나가지만 사라진 존재에 대한 그리움은 “겨울나무가 봄을 품고 오듯” 화자의 삶에 여전히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특히 「‘몹시’라는 그리움 한 덩어리」는 꿈과 현실의 경계를 오가는 몽환적 경험을 통해 애절한 그리움의 정서를 극적으로 표현한다. 불현듯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존재가 주는 상실감은 깨어난 뒤의 현실에서 더욱 깊어지고, “그리움 한 덩어리 슬리퍼 끝에 채였다”라는 표현은 그리움의 물질성을 느끼게 해주는 빛나는 표현이다.
「그때처럼 오후 3시를 걸었지」와 「그리운 사람들은 청평사에 간다」에서 드러나는 장소성은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부재를 연결하는 상징적 공간으로 작용한다. 과거의 친구들, 잊혀진 장소들은 단지 기억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화자가 실제로 걷고 움직이는 공간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 「절반의 어느 방향입니까, 당신은」에서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대화를 불러일으키는 출발이 된다. “죽은 이들을 불러내 넓디넓은 거주지를 채워가는 놀이”라는 표현처럼, 시인은 떠난 이들을 불러내어 죽음과 삶 사이의 경계를 허문다.
또한 「시가 되는 것들은」에서 화자는 상실을 받아쓰는 존재로 자신을 정의하며, 잃어버린 순간들과 떠나간 사람들을 시어로 기록한다. 상실은 결국 그리움으로 환원되고, 시인의 쓰기는 그 그리움의 형태를 베끼는 행위이다. 「빈집」과 「한 장의 사진」은 떠나간 존재들의 흔적을 담담히 기록하면서도 애절한 정서를 극대화한다. 빈집은 기억의 흔적으로 가득하고, 한 장의 사진 속 어미 새와 새끼들에 대한 이미지는 상실의 결정적인 순간을 상징적으로 포착해 보여준다.
이 시집은 상실을 거부하지 않고 그리움을 깊숙이 들여다보며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부재의 존재를 확인한다. 도복희 시인은 담담하면서도 예리한 시선으로 독자들에게 상실을 받아들이고 살아내는 법을 조용히 제안한다. 독자들은 이 시집을 통해 그리움이라는 감정을 더 깊이 이해하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꿈의 풍경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의 말
돌고 돌아와 고향에 닻을 내렸다
지난 일 년간 골목골목 부여를 걸었다
이곳의 시어들을 받아 적느라
잠들지 못한 저녁이 길었다
시집 속으로
적당히 내리는 봄비가 양철지붕에 내려앉을 때
침묵하는 방법도 알았다
「해 질 무렵처럼 지내고 있어」 부분
너를 그리워하지 않기 위해
더욱 간결해지는 중이다
「간결한 하루」 부분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 버려서
오래된 생활의 태도가 익숙해져서
우리는 이제 무심한 예의로 통한다
「쓸쓸한 무늬」 부분
우선 새순이 돋아나는 동안만
기다리기로 했다
당신을 알아가는 데
목요일의 세시를 내주기로 약속했다
「오늘의 세시는 당신 없이 지나갔지만」 부분
지금처럼도 괜찮습니다
천천히 지나가 보겠습니다
봄나무 가지마다 희망이라는 잎눈을 매달고
「그때의 선택이었습니다」 부분
서동로를 걷다 보면 아사달을 기다리는 아사녀들이 성당 옆 골목을 빠져나와 부소산성 고란사 방향으로 산책길에 오르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이곳은 지금도 백제가 살아 있다
「산책자들의 도시」 부분
너와의 대화는
죽은 이들을 불러내
넓디넓은 거주지를 채워가는 놀이다
「절반의 어느 방향입니까, 당신은」 부분
그 자리 그대로 서서 기다리는
버려진 시간
돌아올 거란 약속도 하지 않고
네가 떠나갔다
「헝겊 인형」 부분
펼쳐 놓은 몇 권 시집과
책상 위에서 함께 졸고 있는 풍경이
전생 같았어요
「오후에 찾아들던 방」 부분
목각인형이 창틀에서 기다리는 시간에
통나무 장작이 기세 좋게
타오르는 난롯가에서 함께 졸고 있자
「꿈꾸는 집 2」 부분
돌아올 사람이 지상을 떠난 집은
초록색 방수 페인트가 벽과 지붕에서
제일 먼저 들뜨기 시작했다
「빈집이 있는 골목」 부분
금요일 오전을 접으면 대체로 비가 내린다
빗방울 털어낸 열람실에서
시집 다섯 권으로 요새를 짓던 날
「도서관이라는 숲」 부분
이쪽에서 저쪽에 눈을 둔 건
잘못이 아니었지만
슬픔이라는 비수에 찔린 건
지상의 비를 재촉하는 결과를 낳았다
「로드킬 당한 고라니 한 마리에 대하여」 부분
폭설이 그친 후에라도 굵고 튼실한 햇살이
시시각각 아무런 곳에나 다발로 쏟아지는 곳이면 좋겠네
「꿈꾸는 세상에는 조팝꽃이 피었다」 부분
저녁을 맞다 보면
또 살아졌구나, 했으니
더 이상 바랄 일 없어서
혼자로의 거처도 더는 무섭지 않았다
「살다 보니 살아지더라 」 부분
차례
1부 기대하지 않는 법도
외로우면 외로운 대로 사는 법도 배웠다
생이 다소 쉬워졌다
해 질 무렵처럼 지내고 있어/ 시를 언제 쓰냐고 물었다/ 장미슈퍼엔 장미나무가 없고/ 간결한 하루/
쓸쓸한 무늬/ 봄에 한발 들어서자/ 오늘의 세 시는 당신 없이 지나갔지만/
제주에서 군산까지 –그리움의 거리/ 전생에 만났던 너와 해후하게 될지도/ ‘몹시’라는 그리움 한 덩어리/
그 아픔을 내게 주소서/ 눈이 녹고 있는 날처럼/ 오늘의 기도를 노을빛에 걸고/ 배경이 없어서/
그때의 선택이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방법
2부 보라색 스웨터를 무릎까지 덮고 있었지만
겨울을 피하기에는
너무 얇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월의 정서/ 산책자들의 도시/ 그때처럼 오후 3시를 걸었지/ 틈날 때마다 서해로 떠났다, 우리는/
나희덕을 읽는 사이/ 뻔하지 않기 위해 나는/ 절반의 어느 방향입니까, 당신은/ 잠깐 눈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일요일의 무인카페/ 저녁 여섯 시 이후/ 오후에 찾아들던 방/ 헝겊 인형/ 그리운 사람들은 청평사에 간다/ 꿈꾸는 집 1/ 꿈꾸는 집 2/ 시가 되는 것들은/ 숨기기 힘들지 연애
3부 깨진 액자 안
분홍 한복 입은 그녀의 웃음이 아직도 분홍이다
빈집이 있는 골목/ 골목 사람들 1 -그는 이제 새벽길에 나서지 않는다/ 골목 사람들 2 –길고양이 집/
골목 사람들 3 -기억을 어디서 잃어버렸을까/ 골목 사람들 7 -슬프지 않은 사람만 손들어 주세요/
지금은 아무도 계절을 키우지 않는다/ 초왕리 빈집 한 채/ 빈집 –입포로9번길 13/ 신이 당신을 사랑한 이유/ 벽난로/ 도서관이라는 숲/ 고향엔 착한 이웃들이 산다/ 그때의 얼굴들이 궁금해/
구름이 사라졌습니다/ 청유형으로 말하면 휘파람이 될 거야
4부 나는 다시 자유롭게
경계에서 경계를 허무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한 장의 사진/ 신도 잠든 시간/ 제이미 맘 이수지/ 싱싱한 소문/ 아무것도 손쓸 수가 없었다/
나는 고독사한 청년입니다/ 숨으로 만든 나무와 달과 햇빛/ 로드킬 당한 고라니 한 마리에 대하여/
19세 청년 샤반 알달루/ 난전에서 시든 나물을 샀다/ 서로를 질투하지 않을 방법/ 굳이 재밌는 일이 없어도/ 꿈꾸는 세상에는 조팝꽃이 피었다/ 살다 보니 살아지더라/ 아프지 마라
해설 _ 불온한 안부의 세계선世界線
전형철(시인, 연성대 교수)
해설 중에서
사막과 광활한 초원 ‘몽골’을 거쳐 도복희 시인은 이제 “돌고 돌아와”(「시인의 말」) 고향이라는 공간에 닻을 내린다. ‘뿌리를 내렸다’가 아니라 ‘닻을 내’렸기 때문에 기실 시인의 귀환은 멈춤이 아니라 “골목골목”을 걸어 발견한 모세계母世界의 틈과 주름을 확인하는 ‘다름의 귀환’을 기저로 한다. 불투명한 동일성에 빠져 고향을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선의 이동을 통해 발견한 불온한 감각과 국면局面의 재발견은 그의 시집이 서정의 질 좋은 선취를 기반으로 기품을 잃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가열찬 사유의 파문과 시간과 장소라는 종축과 횡축을 돌파하는 세계 내 존재의 탐색을 동시에 구축해내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의 시집 『꿈꾸는 세상에는 조팝꽃이 피었다』는 처음에는 서정시의 진경의 순간을 확인하는 슴슴함에서, 거듭될수록 시간과 위치의 종횡에 지난하고 매섭기 그지없는 기치로 존재론적 차원에서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 살아 있는 것의 불완전성이 아니라 꿈과 불가능성에 대한 불완전성의 사유가 그의 시 속에 은밀하게 내장되어 작동하고 있다.
집착하는 애인처럼 살아냈다
미지의 장소를 정해 오후를 건너왔다
이제 애쓰지 않아도
가벼운 쪽으로 걸음을 돌려놓았으니
하루하루가 쉽게 지나가게 되었다
내일을 희망하지 않으니
오늘을 살면 그만이었다
목 늘어진 스웨터를 입고 있는 것만큼이나
가난도 웬만큼 익숙해졌다
음식점 메뉴판에서 가격 먼저 보는 것이
습관이 된 것처럼
튤립 구근이 올라오는 소리에도 집중하기로 했다
적당히 내리는 봄비가 양철지붕에 내려앉길 기다려
침묵하는 방법도 알았다
기대하지 않는 법도
외로우면 외로운 대로 사는 법도 배웠다
생이 다소 쉬워졌다
- 「해 질 무렵처럼 지내고 있어」 전문
서시에서 시인은 “집착하는 애인처럼 살”았다고 고백하며 시집을 연다. 나를 내가 아닌 외적 개념에 의해 규정하고 그에 연연하던 태도에 대한 각성은 시인이 이번 시집을 묶는 시작점, 첫 세계점의 인자이다. 누구와 “상의한 적 없지만 자연스럽게 들어선 형식”(「쓸쓸한 무늬」)이라는 애쓰지 않음은 “미지의 장소”와 “오후”의 발견으로 이어진다. 무거움이 아닌 가벼움으로 세계의 방향을 튼 그는 신대륙을 발견한 것처럼 “내일을 희망하지 않으니 오늘을 살면 그만이었다”는 시적 언술을 부려놓는다. 세계선의 기본 개념이 미래를 선취하는 것이 아니라 늘 현재에 수렴되는 현실에 충실해 ‘나라는 입자의 위치를’ 고뇌하는 것처럼 시인에게 이것은 하나의 선언이자 역사歷史가 된다. 늘어진 스웨터의 익숙함과 가격을 먼저 보는 일상성에서 시인은 “튤립 구근이 올라오는 소리”에 집중하며 “봄비가 양철지붕에 내려앉길 기다려 침묵하는 방법”을 비로소 체득하게 된 것이다. 이 아름다운 두 구문은 나이 듦의 나와 거처로써의 세계가 걸쳐 있는 대위적 의미로써 “해 질 무렵”을 포월包越한다. 그리고 시인의 품성인지 그의 노정이 만든 진솔함은 ‘생이 쉬워졌다’가 아니고 생이 “다소” 쉬워졌다며 끄트머리를 열어 놓는다.
하나 같이 축축하다
지금 여기에 없는 너이고
사진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웃음기이다
더 이상 통화되지 않는
친구였던 옛 이름이고
주고받을 어떤 말도 남아 있지 않은
침묵의 순간이다
떠난 애인이 선물로 준
보풀 일어난 목도리이며
쓰다 두고 간 전화번호에서 들려오는
모르는 사람의 목소리다
무심하게 흘려보낸 선택이며
이제는 마주할 용기조차 나지 않는
멀어진 우리들의 시간이다
홀로 있는 익숙함으로
농익은 그리움의 무게다
너는 시로서만 찾아오고
나는 그런 너를 받아 적는다
- 「시가 되는 것들은」 전문
…(중략)…
시인에게 시 쓰기란 “신이 걸어간 쪽으로 따라가”(「오늘 세시는 당신 없이 지나갔지만」)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을 때”(「시는 언제 쓰냐고 물었다」) 가장 낮고 어둡고 축축한 곳에 임재臨在한 신과 함께 걷는 것이다. 이 위대한 비극은 하여 슬픔이 아니라 정신의 위대함을 일깨우는 일이며 현실이란 세계선을 적극적으로 만들고 형성하는 일이다. 때문에 그가 더불어 걷고자 하는, 듣고자 하는 신의 이칭異稱은 “없는 너”이며 “옛 이름”이자 “침묵의 순간”이며, “모르는 사람의 목소리”이다. “멀어진 우리들의 시간”에 “홀로 있는 익숙함”으로 “너를 받아 적”고 있는 시인은 사라져가는 아니 끝없이 항행하는 제 존재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고 있다.
그렇게 “오목가슴에 박혀 떨어지지”(「시를 언제 쓰냐고 물었다」) 않는 통증을 “소금 알갱이 몇 알 입안에 털어 넣으며”(「뻔하지 않기 위해 나는」) 시인 도복희는 불완전해서 불온한 무한 우주의 모든 세계선과 더불어 지금 꿈꾸는 중이다.
조팝나무꽃 사방에 만개하는 날까지
그대 오는 발자국 소리
산모롱이에서부터 들려오는 날까지
기다림의 계절을 살아내야겠네
- 「꿈꾸는 세상에는 조팝꽃이 피었다」 부분
해설 _ 전형철(시인, 연성대 교수)
저자 약력

도복희
충남 부여 출생. 충남대 국어국문학과, 한남대 사회문화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11년 『문학사상』등단. 시집 『그녀의 사막』 『바퀴는 달의 외곽으로 굴렀다』 『외로움과 동거하는 법』 『몽골에 갈 거란 계획』 『꿈꾸는 세상에는 조팝꽃이 피었다』 등. 천강문학상 우수상, 3회 전국 계간지 우수작품상 수상. 문학나눔 도서보급사업(2020, 2024), 충북문화재단 기금(2021), 충남문화재단 기금(2025) 선정. 현 동양일보 취재부 부국장(부여·서천지역 담당).
phusys2008@dynews.co.kr
도복희 시집 꿈꾸는 세상에는 조팝꽃이 피었다
상상인 시선 062 | 2025년 6월 18일 발간 | 정가 12,000원 | 128*205 | 114쪽
ISBN 979-11-93093-95-5(0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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