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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김시림의 시집 『나팔고둥 좌표』는 작고 가녀린 것들에 손을 내민다. 시인은 따뜻한 애정 어린 시선으로, 또한 섬세한 감각의 언어로 이들을 관찰하고 또 그려냄으로써 독자들을 새로운 세계로 인도한다. 이 시집은 병원, 호수, 산사, 무너진 집, 수몰된 마을 같은 공간들을 무대로 삼아, 삶과 죽음, 기억과 소멸, 자연과 인간이라는 무거운 주제들을 절제된 시선으로 풀어낸다. 그러나 이 절제는 냉정한 관조가 아니라, 오히려 애틋한 애도와 깊은 공감에서 비롯된 미학이다.
표제작 「나팔고둥 좌표」는 병원 로비의 수족관과 병실의 인간 존재를 겹쳐놓으며, 고요하고 투명한 시선으로 죽음을 앞둔 존재의 여정을 그린다. 병상에 누운 이는 더 이상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지만, 시인은 “몰래몰래 눈에 보이지 않게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일까”라고 질문하며 그 움직임에 좌표를 찍는다. 이는 생의 마지막 구간에 놓인 이들의 여정에도 ‘방향’과 ‘의미’가 있다는 일종의 존중의 표시이다. 시인은 마치 나팔고둥처럼, 조금씩 움직이며 자리를 옮겨가는 생의 미세한 흔적들을 섬세한 시어로 포착해 그려낸다.
「이토록 가깝고도 먼」은 그리움과 존재의 경로를 시적으로 구현해 낸 수작이다. “160센티미터도 안 되는/이 작은 몸에도 네게로 가는 길이 있다”는 구절은 감정이 어떻게 실체적 진실로 나아가는 길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길은 가깝고도 멀며, 출렁이는 감정의 수평선처럼 아슬아슬하다. 결국, 시인은 인간의 마음 또한 하나의 ‘좌표계’로, 보이지 않는 세계와 연결된 통로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시집은 자연과 인간, 시간과 장소가 서로를 비추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등을 걸다」에서는 폭설로 부러진 나뭇가지들 속에서 “작고 가벼운 것들도 쌓이고 쌓이니 폭력이 된다”는 문장이 이 시집의 전반적 분위기와 주제를 암시한다. 김시림 시인은 눈송이처럼 무해한 것조차 축적되면 누군가의 삶을 꺾는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작고 평범한 이미지로부터 거대한 통찰을 이끌어 내는 시인의 시적 자세는, 이 시집 전반에 걸쳐 일관되게 유지된다.
「파란 양철지붕 집」과 「대청호 아래」는 시간과 장소가 지워진 흔적을 더듬으며, 잃어버린 공동체와 기억의 잔영을 애도한다. 시인은 재개발로 허물어진 집, 수몰된 마을과 같이 사라진 존재들의 체온과 목소리를 세심하게 복원한다. 이때 시어는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감정을 응축시켜, 독자에게 오랜 여운을 남긴다.
자연 역시 시인의 중요한 감각 대상이다. 「햇살 숟가락」, 「석공의 암호 코드」는 눈송이, 갈참나무, 제비꽃 같은 미세한 사물들을 통해 폭력과 기억, 침묵과 기원을 들춰낸다. 이를테면 「햇살 숟가락」에서는 말을 잃은 요양원의 노인과 죽은 갈참나무가 병치된다. 말 대신 입에 들어가는 숟가락, 움직이지 못하는 침상 위의 몸. 시인은 인간의 늙음과 침묵을 나무의 고요함과 겹쳐 그린다. 이때의 시선은 연민이 아니라 함께 숨을 고르는 듯한 따뜻한 공존에 가깝다. 「석공의 암호 코드」는 서울 호암산성의 석구상을 통해 역사의 잔존물과 그 안에 감춰진 메시지를 들춰낸다. 조각상 틈에 피어난 제비꽃은 수백 년 전 석공이 남긴 ‘지켜달라’는 암호처럼 읽히며, 시간의 층위를 넘나드는 시적 해석을 가능케 한다. 시인은 유적도 꽃도 조용히 응시하며, 오늘의 우리가 그 자리를 어떻게 지키고 있는지를 묻는다.
『나팔고둥 좌표』는 전체적으로 조용한 목소리의 시집이다. 격한 감정의 변화나 선언적인 주장은 없다. 그러나 그 고요함 안에서 울리는 파장은 깊고 길다. 나팔고둥을 귀에 대면 들리는 바다의 파도 소리처럼, 이 시집도 삶의 작은 숨결과 잊힌 풍경들을 세심하게 길어 올려 우리에게 건넨다. 김시림 시인은 사라지는 것들을 바라보되, 그것들이 남긴 흔적을 더듬으며 시적 언어로 기록하고 존중한다. 그의 시는 감각적이면서도 사유 깊고, 비극을 묘사하면서도 희망의 실마리를 놓지 않는다. 이 시집은 삶이라는 바다에서 귀를 기울일 때 들려오는 나직한 나팔고둥의 울림처럼, 독자의 내면에 오래도록 잔향을 남긴다.
시인의 말
밀물이다가
썰물이다가
만조滿潮이다가
간조干潮이다가…
끝없이 부침하던 마음의 파도들을
여기 이 모래톱에 부려 놓는다
다시, 맨발로 먼바다를 건너올
어린 햇살을 기다린다
김시림
추천사
한 권의 시집은 퇴적물이 쌓인 지층의 단면과 닮아 있다. 파지破紙처럼 버려진 생각들, 갈등과 불면의 시간을 거쳐 선별된 시어들, 인식을 뛰어넘는 저편의 언어들은 작품의 기저基底를 이룬 각각의 지층이다.
한 사람의 궤적이 한 권으로 요약되고 시인이 통과한 삶의 여정을 따라가면 소거되거나 퇴색해 가는 것들의 흔적을 만나게 된다. 김시림 시인은 삶의 언저리에 접속하고 소외된 약자들의 쓸쓸한 내면을 담담히 서술한다. 이때 내부에 잠재된 슬픔은 모두의 슬픔으로 변용된다.
시인의 관점은 삶의 진실에 접근하고 동참하는 것이다. 주변의 문제에 개입하고 아파할 때 타인은 ‘파레르곤Parergon’이 되어 중심부에 영향을 미친다.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를 발견하는” 『나팔고둥 좌표』는 인간 본연의 자세를 중시한다. 무엇보다 여음餘音이 남는 시의 여백은 시인에게 가장 큰 힘이다.
_마경덕(시인)
김시림의 시들에는 곧 사라져 갈 운명을 가진 작고 약하고 하찮은 것들이 자주 등장한다. 시인은 이들의 슬픔과 고통을 애정 어린 눈길로 바라보고 안온한 언어로 위로한다. 그의 시들이 애잔하면서도 따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시림 시인은 우리의 일상에 마주치는 사소한 것들을 놓치지 않는다. 아니 눈에 띄지 않는 것들을 찾아 우리 눈앞에 다시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만든다. 그의 시를 읽으면 우리는 모두 나팔고둥이나 개망초가 되고 애벌레나 강아지풀이 된다. 이 작은 것들이 세상을 이루고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겪고 있는 슬프고 고통스러운 삶도 결코, 허무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김시림의 시가 주는 치유의 힘이 바로 이런 것이다. 마치 지친 몸으로 찾아 들어간 산사에서 얻어 마신 한 잔의 보이차처럼 그의 시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훈훈하게 덥혀 준다.
_황정산(시인, 문학평론가)
시집 속으로
한 번도 뵌 적 없는 당신이 지상을 떠나가고 있을 때
나는 에릭 시걸의 소설, 특별한 만남을 읽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서랍장」 부분
나도 저들처럼 작은 선물로 와서
이 지구 행성 좌판에 명찰을 내걸고
무수히 시행착오 해가며
삐뚤빼뚤, 오타투성이로 살고 있네
-「삐뚤빼뚤 팻말」 부분
가고 없는 것들이,
생각에 생각을 파종하는
저 화분에는 자동으로 켜지는 생각센서가 살고 있습니다
-「생각을 심다」 부분
줄 한번 탁 놓아버리면
곧장
모두가 제집일 텐데
방하착放下著,
참 어렵나 봅니다
-「수직의 몸짓」 부분
사라져 간 것들이 염전의 아기 소금처럼
톡, 톡, 톡
몸을 부풀리고 있다
-「육생 비오톱biotope」 부분
몰래몰래 눈에 보이지 않게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일까
며칠 전 눈대중으로 좌표를 찍어 둔 자리보다
한 뼘쯤 옮겨 앉은
저 나팔고둥처럼
-「나팔고둥 좌표」 부분
이제는 우리가 아니어서
두 개의 발자국만이 나를 따라온다
-「두 개의 발자국은 어디로 갔나」 부분
나는 그만, 하늘과 심장 맞대고 한 호흡하는
먼바다 외줄 수평선
내 몸이 심하게 출렁거리는 날
돌아오는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하는
가깝고도 먼 길
-「이토록 가깝고도 먼」 부분
소처럼 우직한
당신이라는 둘레길
다 걸어보고 싶었습니다
-「우도에서」 부분
날마다 나를 떠나가는
나였던 솔가리들
안녕, 잘 가
-「날마다 떠나가는」 부분
차례
1부 아득한 물길을 걷고 있다
물결/ 나팔고둥 좌표/ 봄을 지나다/ 가재길 77/ 러브버그Love Bug/
두 개의 발자국은 어디로 갔나/ 문을 잠그다/ 이토록 가깝고도 먼/ 가재길 58/
물방울의 한 생/ 검지에 담긴 선물/ 관계자 외 출입 금지/ 청둥오리의 물갈퀴질
2부 이제 막 발아한 사랑처럼
조등을 걸다/ 커튼 너머/ 월미 전망대에 올라/ 구월 저녁/ 파란 양철지붕 집/
당신의 서랍장/ 물망초 합창단/ 지폐를 태우는 여자/ 돌김 세 톳/ 느릿느릿/
흔들리는 뱃전/ 양팔저울 기울기/ 늦가을 근처/ 표류
3부 생각을 심어 놓고 가야지
입추 무렵/ 대청호 아래/ 구름에 의탁하다/ 먼바다 돌아온 바람/ 햇살 숟가락/
삼잎국화꽃에 앉은 네발나비/ 삐뚤빼뚤 팻말/ 하나의 꽃나무가 되어/ 대흥사 가는 길목에서/
고구마 반 상자/ 이제 그의 소리는 없다/ 생각을 심다/ 지지대/ 도겸이는 반 살
4부 사라져 간 것들이 염전의 아기 소금처럼
수직의 몸짓/ 텃밭에도 이치가 있다/ 또 혼자다/ 오도리 마을 지나다/ 육생 비오톱biotope/
오래 생각하는 아침/ 우도에서/ 석공의 암호 코드 / 내 맘속 그물집 한 채/ 마지막 모과 한 알
체외충격파치료(ESWT)/ 날마다 떠나가는/ 꽃발자국/ 꽃물 들다
해설 _ ‘자연-생명’들의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교감
방민호(문학평론가, 서울대 국문과 교수)
해설 중에서
‘상실’을 넘어 서로 양육하는 생명들의 “숲”으로
『나팔고둥 좌표』의 마지막 남은 문제라 생각되는 것은, 그렇다면 이 세계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일 것이다. 이 시집에 은은하게 흐르고 있는 감정은 떠남과 이별의 상실감이다. 이 시집의 화자들은 정든 곳, 정든 사람으로부터 멀어지고 떨어져 현재에 서 있다. 어느덧 삶의 봄날들은 계곡물을 따라 흘러내려 간 동백꽃처럼 멀어져 버렸다. 자신은 지나간, 멀어진 삶의 시간들을 의식하며 현재의 삶을, 그리고 남아 있는 삶의 시간을 어떻게든 ‘영위’해 가야 한다. 시집에서 이 상실감은 무엇보다 정든 사람으로부터의 떠남으로 나타난다.
갈매기 한 마리가 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진다
무엇을 찾아가는 길일까
사람들 마음엔 생각 프로그램이 담겨 있어서
160센티미터도 안 되는
이 작은 몸에도 네게로 가는 길이 있다
가만히 있어도
그리로 간다는 것은
반질반질 길이 나 있다는 것
한아름의 그리움이
별빛과 싸락눈과 새소리와 천둥번개로 쌓인
그 길 위에 서면
나는 그만, 하늘과 심장 맞대고 한 호흡하는
먼바다 외줄 수평선
내 몸이 심하게 출렁거리는 날
돌아오는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하는
가깝고도 먼 길
―「이토록 가깝고도 먼」 전문
이 시에서 사랑의 상실은 삶의 “길”을 찾을 수 없다는, “길”의 상실에 연결된다. “160센티미터도 안 되는/이 작은 몸에도 네게로 가는 길이 있다”라는 화자의 고백은, 잃어버린 사랑이 화자에게 미친 파괴적 영향을 나타낸다. “길”은 ‘너’를 향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 “길”은 사라져 버렸다. “돌아오는 길”은 ‘가깝고도 멀다’. 사랑의 상실이 가져온 파괴적 영향을 시인은 「청둥오리의 물갈퀴질」에서는 “오리”에게서 “물 위에 뜨는 법”을 “다시 배우”고 있다는 체념적 고백으로도 나타낸 바 있다.
“당신”, “너”와의 이별이 선사하는 고통의 깊이는 다음의 시에서 가장 선명한 표현을 얻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략)…
시란 참 신묘하다. 세상이 이렇듯 소란스러운데도 일단 시의 세계로 들어서면 전혀 ‘별세상’이 ‘따로’ 열려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 ‘별세상’은 넓고 깊고 그윽하다. 언어의 분량이 많지 않은 데도 그 자체로 ‘무궁무진’한 하나의 세계, 그것이 바로 시의 세계다.
시를 쓴다는 것은 한 세계를 창조하는 일이다. 좋은 시는 이 ‘무궁무진’한 한 세계의 ‘열림’ 그 자체라 할 것이며, 시를 읽는다는 것은 이 ‘열림’을 향해 감각과 감정의 촉수를 내미는 일이다. 일찍이 정지용은 시의 오묘함을 가리켜 ‘바다’는 연잎처럼 오므라들고 펴진다고 했다. 여기서 ‘바다’란 곧 ‘시’ 그 자체이며, 이 ‘바다’가 우리를 향해 오므라들고 펴진다 함은 ‘시’와 우리의 교섭과 교감을 가리킨다. 김시림 시인의 『나팔고둥 좌표』의 편편 시들을 읽으며, 필자는 이 교섭과 교감의 보람, 기쁨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방민호(문학평론가, 서울대 국문과 교수)
저자 약력
김시림
전남 해남 출생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91년 『한국문학예술』, 2019년 『불교문예』로 등단
시집 『쑥냄새 나는 내 이름의 꿀떡게 바닷가』 『그리움으로 자전거 타는 여자』
『부끄럼 타는 해당화』 『물갈퀴가 돋아난』 『나팔고둥 좌표』
심호이동주문학상 수상
『불교문예』 편집장
sinamu@hanmail.net
김시림 시집 나팔고둥 좌표
상상인 시인선 069 | 2025년 5월 21일 발간 | 정가 12,000원 | 128*205 | 140쪽
ISBN 979-11-93093-91-7(0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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