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드를 잡는 잠” 이승예 시집(시인수첩 시인선 095)
발행일: 2025년 4월 21일 / 판형: 장사륙판(124×198mm) 쪽수: 120쪽 / 정가: 12,000원 / ISBN 979-11-92651-35-4 03810
◨ 시인 약력
.
이승예 시인
2015년 《발견》으로 등단하여 시집으로 『나이스 데이』, 『언제 밥이나 한 번 먹어요』가 있다. 제5회 <김광협 문학상>, 제20회 <모던포엠 작품상>을 수상했다.
sharlon107@hanmail.net
그로테스크, 달걀을 이해하는 실존적 생활방식
2015년 《발견》으로 등단한 이승예 시인이 시집 『코드를 잡는 잠』이 시인수첩 시인선 95번으로 출간되었다. 이승예 시인은 <김광협 문학상>(제5회), <모던포엠 작품상>(제20회)를 수상한 바 있으며 신인으로서는 드물게 치밀한 언어 운용을 통해 중량감 있는 문장과 이미지를 생산한다는 문단의 평을 받고 있다.
총 4부로 구성된 이번 시집은, 등단 이후 시인이 꾸준히 천착한 언어의 마지막 벽, 요컨대 극한에 이르는 상상력의 전개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 또한 그 ‘언어’에서 비롯되는 언어 자체의 무수한 응축과 확장, 환원과 전개, 돌연한 등장과 사라짐 등을 오로지 시인이 이끌어낸 문장으로 답사(踏査)한다는 점에서 그 무게가 남다르다.
무엇보다 시인은 대상을 응시하되 단지 ‘바라봄’으로 그치지 않으며, 대상의 약한 고리와 미세한 균열을 찾아낸다. 이 과정에서 대상은 그것이 지금까지 유지해 왔던 형체를 벗어버리게 된다. 이를테면, “비가 내립니다 / 올려 치는 / 빗줄기를 당겨 팽팽하게 튜닝합니다 / 잠은 G 코드로 옮겨 갑니다”(「코 드를 잡는 잠」)라는 문장에 나타나는 것처럼, 액체의 ‘빗줄기’도 금속성의 기타줄로 얼마든지 바뀌고 개방현을 충분히 활용하는 G코드의 맑고 청아한 화음을 생산할 수 있는 대지의 악기로 치환된다.
아울러 “곰팡이 냄새가 흐린 불빛을 켜 둔 / 여인숙에서 하룻밤 묵어간다 / 기대어 본 적 없는 벽엔 누가 헤어지자고 했는지 / 처진 어깨들이 촘촘히 걸려 있다 / 벽지에선 목단이 피느라 한창인데 / 맞대는 벽과 투숙객의 등은 딱딱한 질감을 가졌을까”(「어깨들이 저린 벽」)과 같은 문장은 기묘하다 못해 온통 그로테스크로 둘러쳐 있다. 하룻밤을 묵는 여인숙 벽에 처진 어깨들이 촘촘히 걸려 있다니, 그 환상에는 분명 씻기 어려운 통증이 흐르고 있을 것이다.
어떤 나라에서는
염소를 네 번째 천국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지요
염소 똥이 진리라고
나는 첫 번째 천국이라고 믿어요
흥건한 시간을 기록하는 힘이 있어요
― 「염소와 시인」 부분
도대체 염소를 네 번째 천국이라 부르는 나라가 있을까. 의뭉스럽게도 시인은 “염소 똥이 진리라고 / 나는 첫 번째 천국이라고 믿”는다고 선언에 가까운 말투로 고백한다. 이 문장은 그 진위여부를 가릴 수 없으며, 더더욱 사실이나 진리의 재현과는 거리가 너무 멀다. 게다가 그 목소리도 거칠고 어떤 면에 서는 음험하기도 하다. 이는 염소가 “흥건한 시간을 기록하는 힘이 있”다는 시인 나름의 실존적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지만, 이 문장은 역사 자체를 무위로 되돌리는 충격파가 압축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곳으로의 진입은 절박하게 절벽을 뛰어내린, / 스스로 고난을 지고 절벽을 기어오른, / 저 좁은 통로를 걸어오는 당신과 / 저 좁은 통로를 걸어오다 되돌아가는 당신과 // 모두 차별 없이 저물어 가시지요”(「모넴바시아」)라는 문장이나 “식탁 위에 오를 노른자위와 노을이 졸아들고 / 무와 무의미도 졸였는데 난데없이 / 소크라테스와 한하운이 생각납니다”(「스패너」)와 같은 문장처럼 대상에 대한 실존적 자각은 평등을 통한 환유의 응집을 매개한다.
이러한 시도는 과거에서도 있었지만, 이승예 시인에게 이르러 좀 더 섬세하게 축조된다. 가령, “약속 시간을 12시로 잡으면 / 바다를 빗겨 파도 쪽으로 새벽을 끌어당길 수 있습니다 / 수백 번 찢고 수백 번 물에 담갔던 청바지 / 찢어진 바다를 입어보자고요”(「청바지를 입자고요」)라는 문장에는 굴지의 한국 제과기업과 미국 의류기업의 광고-이미지가 박혀 있으면서 동시에 ‘찢어진 바다’라는 환경의 문제까지 파고든다.
슬플 때 노을을 보았다던 어린 왕자처럼
아버지가 지구를 다녀가시는 동안
나도 붉디붉은 노을을 보았지
엄한 아버지,
살면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의 배꼽은
베어지고 나서야 드러나 딱 한 번 보았다
나도 겹친 살을 들어 올리고 나의 배꼽을 들여다본다
아버지를 닮았다
나와 아버지 사이로 오동꽃이 배꼽처럼 오무라진다
― 「오동나무 배꼽」 부분
위 인용시는 대상의 약한 고리와 균열이 새로운 자아로서 시인의 내면에 자리잡는 과정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작이다. 시인은 생전 아버지의 육신을 모신 오동나무 관을 바라보면서, 오동꽃 내음을 맡는다. 그 꽃이 맺혔던 계절은 결코 되돌릴 수 없지만, 그 시간에서 아버지는 무수한 항성을 배회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가 지구를 다녀가는 동안 시인도 붉디붉은 노을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런데 시인의 통찰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아버지와 오동의 사이에서 흘렀던 그 ‘내음’은 어느새 시인의 배꼽에도 옮겨져 왔으며, 항성을 배회하는 아버지의 숙명을 정교하게 투사하고 있다. 이러한 사태는 대상을 더 이상 눈앞에 던져진 사물이 아니라 시인의 내면에 응축된 제3의 자아로 확장하는 데까지 이른 반증이라 할 수 있다. “수면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 집 벨을 누른다 / 문 앞에 물이 포개지듯 방금 밀려온 물결 / 금세 알아차렸다 / 저것은 문에서 빠져나온 차디찬 함성 같은 것”(「물의 아파트」)에서 는 이미 물결은 ‘문에서 빠져나온 차디찬 함성’이며, “달걀과 닮은 센서 등을 갈아 끼우는 밤입니다 / 달걀이 서른 개라서 친구의 이름도 서른 명을 기억하는 밤입니다 / 서른 개의 지구에 불이 들어오면 / 달걀이 껍질을 깨고 나오는 밤이 되겠지요 / 전구 서른 개에 친구들의 이름을 써야겠습니다”(「달걀을 이해하는 밤」)에서는 달걀은 이미 생활을 살아가는 실존의 한 방식이 되어버린다.
★★
◨ 다음은 시집에 관하여 시인과 나눈 짧은 인터뷰 내용이다.
[Q] 주제와 이야기의 방향은?
[A] 그동안 시를 써오면서 고민했던 부분을 일정 부분이라도 담아냈는지 생각해 본다. 괴테는 색채론의 물리색에서 “호주머니 칼을 촛불에 갖다 대면 색채를 띤 줄무늬가 칼날 비스듬히 생겨난다. 불 속 가장 깊은 곳에 있었던 부분의 줄무늬는 담청색으로 보이다가, 이내 적청색으로 변한다. 가운데 부분은 자색으로 보이다가 잇달아 주홍색과 황색이 뒤이어 나타난다.”고 말했다.
나도 몇 번은 보았던 현상이다. 나의 이번 시집의 주제를 굳이 정리해 본다면 억압된 분노와 생명의 존엄성, 그리고 어두운 사회적 상황 속에서 잊을 수 없지만 잊힌 것처럼 심연에 가두어 두었던 자아를 ‘꺼내기’의 시학으로 시도했다. 칼날에 생긴 줄의 변화하는 색채처럼 우울하기도 하고 명랑하기도 한 시편들이 변화무쌍해서 한 주제를 가진 색채는 아니다. 그러나 모든 시편에서 지양하는 방향은 억압된 감정에서 해방되어 그 감정에 직면한 나의 세상을 적게나마 정지시켜 놓았다고 말하고 싶다.
[Q] 이번 시집의 특징은?
[A] 이전까지는 시를 쓸 때 어떤 사건이나 강렬하게 오는 이미지에서 출발해 그것을 시로 치환하는 방식에 익숙했었다. 그러나 이번 시집의 시편들은 감정의 결을 더 깊이 들여다보고 그 감정에 충실했으며 상상의 끝자락까지 밀고 나가보자는 욕심을 부려보기도 한 것 같다. 그래서 이전 시편보다 표현 방식이 좀 더 거칠기도 하고 강렬하기도 하며 진실하다고 생각한다. 이번 시집은 기존의 이미지 중심의 서정에서 벗어나 현실적 경험과 밀도 있는 상상의 사유를 나란히 놓아보려고 노력하였다.
[Q] 나는 어떤 시인인가?
[A] 누군가 이렇게 말해줬다—“이승예 시인은 무의식의 흐름을 섬세하게 언어화하는 데 중점을 두고 감정의 미묘한 떨림과 내면의 감각을 집요하게 탐색하며, 독자와의 정서적 공명을 추구합니다. 최근 시집에서는 감정에 충실하고자 하는 태도와 상상의 극한까지 밀고 나가는 시를 쓰려고 하는 시도가 돋보이며 강렬하고 진실된 시편들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나는 시를 쓰는 일이 좋다. 그 길이 오롯이 혼자 완성해 가야 하는 길이라서 외롭고 힘들 때가 많이 있지만 시를 써야 시가 된다고 했던 시인의 말을 생각하며 시를 쓴다. 그리고 시를 열심히 쓰는 시인들을 응원한다. 나는 앞으로도 시 쓰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며 시를 쓰는 일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것이다. 어쩌다가 시에게 발이 묶였다. 이승예 시인은 시에게 발이 묶인 시인들을 응원하는, 그런 시인이다.
― 「저자와의 인터뷰」 중에서
◨ 산문 엿보기
내 인생의 연구모형
이승예 시인
아버지
아버지는 새벽잠이 없으셨다. 바지게를 지고 소 먹일 풀을 베러 들판으로 나가시면 나는 그 지게를 받으러 눈을 비비며 들로 나갔다. 나는 야무지고 부지런했다. 어느 날 아침에 아버지 지게를 받으러 대판이 보를 건너는데 지게 다리가 물속에서 하늘로 쳐들려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땅을 짚어야 쓰러 지지 않는다는 운명을 견디다가 한 번쯤은 하늘을 보고 싶었을까 불안한 생각에 달려가 보니 아버지가 바지게 가득 풀을 짊어지고 보를 건너시다가 거꾸로 물속에 처박혀 버둥대고 계셨다. 나는 울 아부지 살려달라고 울부짖으며 힘껏 지게를 밀어냈다. 겨우 지게 끈을 벗어낸 아버지는 대판이 보 벽에 기대어서 거의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자격증이 없는 민간 한의사였다. 마을 사람들이 체하거나 아프거나 하면 한밤중이고 새벽이고 가리지 않고 달려와 아버지를 찾았고 아버지는 언제든 치료에 최선을 다하셨다. 우리 집 마당과 텃밭과 산 밭에 약초를 키워 사람들을 치료하는 일에 쓰셨다. 서울, 부산 등 먼 곳에서도 아버지를 찾아온 환자들은 사나흘을 집에서 묵으며 치료하고 갔다. 1982년에 모스크바 근교 멜리호보의 영지를 사들여서 1897년까지 그곳에서 왕성한 작품 활동에 매진한 안톤 체홉을 생각했다. 몇 해 전 그곳을 방문하여 안내하시는 분에게 물었다. 혹시 체홉이 의사로서 돈을 많이 벌었나요? 안내원이 대답해 주었다. 체홉은 많은 사람들을 무료로 치료해 주었다고 한다. 그런 면이 체홉과 닮은 아버지는 빈곤한 중에도 칠 남매를 굶기지 않으셨다.
하얀 뱀
어머니는 이름 모를 병으로 서울 어느 병원에 두 달이나 입원해 계셔서 어린 나는 아버지와 둘이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안개가 자욱한 날 혼자 산 밭에 올라가 풋고추를 따는데 무서움이 몰려왔다. 여순 반란사건 때 지리산으로 올라가던 반란군 40여 명이 이 길로 가면서 마을 이장과 청년 두 명을 끌고 가다가 처참하게 죽여서 마을 사람들이 사흘 만에 시체로 찾았다고 한다. 좋은 생각을 가졌던 첫 각오 는 왜 그렇게 민간인들을 끌어가고 죽이고 했을까 바로 이 밭 귀퉁이에 한 청년의 신발이 벗겨져 있었다고 들었다. 무서운 생각이 밀려왔다. 서둘러 산 밭을 벗어나 언덕을 막 내려서는데 내 발등 위로 눈부신 흰 물체가 지나가고 있었다. 딱 멈춰서서 숨도 쉬지 못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는 하얀 뱀, 그 민둥하고 물렁하고 보드랍고 간지러운 것이 다 지나갈 때까지. 나의 오른쪽 발등을 길게 길게 다 지나 갈 때까지.
송아지의 눈물
폭우가 쏟아지면 산 바로 아랫집인 우리 집 옆 또랑으로 큰물이 내려왔다. 그날도 혼자 산 밭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빗물이 흐르면서 패인 웅덩이에 송아지가 물을 먹으려고 머리를 들이민 모양인데 머리가 빠져나오질 못하자 중심을 잃고 그만 뒤집어져서 두 다리가 하늘 쪽으로 쳐들려 일어서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얼마 전에 대판이 보에 거꾸로 처박힌 아버지처럼. 나는 큰 소리로 아버지를 부르며 송아지 얼굴 쪽 흙을 맨손으로 마구 파다가 송아지 다리를 잡아당겼다. 뒤집힌 송아지가 구덩이에서 머리를 빼내며 일어서더니 크게 한숨을 쉬면서 달만큼이나 크고 동그란 눈에서 또르르 눈물을 흘렸다. 한 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일까? 생명의 존엄에 대한 내 삶의 철학이 태동했던 순간이었다
(하략)
◨ 시인의 말
식탁에서 컵이 떨어져 깨졌다
문장의 배열도 함께 깨졌다
내 작은 우주가 반짝인다
컵이 깨졌다는 말과
나의 명사가 동사라고 우기는 자리에
항상 누가 있다
★★
◨ 시집 속으로
줄 하나 없는 잠을 잡니다
불면이 내립니다
줄 없이 연주되는 음계에
잠 속에서 가사를 써넣습니다
비가 내립니다
올려 치는 빗줄기를 당겨 팽팽하게 튜닝합니다
잠은 G 코드로 옮겨 갑니다
코드를 옮겨 잡지 못해
현과 현이 서로 다른 음의 노래가 됩니다
내가 살아갈 미래입니다
한 가지의 코드로 나를 작곡한 한 남자는
자신을 잃어버렸다고
내 코드로 옮겨 와 잠을 잡니다
비를 맞습니다
스스로 떨어지며 처음 서보는 팽팽한
현들입니다
나도 따라 뛰어내립니다
빗줄기와 기타 줄
두 가닥의 줄이 생겼습니다
어떤 코드로 옮겨갈까요
연주는
당신
내가
누가 할까요
- 「코드를 잡는 잠」 전문
소나기를 몰고 걸어갔다
서쪽에서 시작해 내일 없는 서쪽으로
얼굴과 뜨거움을 내밀고
체온은 두고 갔다 기후만 데리고 갔다
무릎의 뒤쪽 무릎이 꺾이지 않는 쪽으로 걸어갔다
인형의 한쪽 눈을 묻은 곳
그곳에서 자주 소나기를 만났다
기후는 서쪽에서 예측되고 서쪽부터 불안해졌다
해 짧은 서쪽으로 걸어갔다
뜨거움을 잊으려고 걷는 일과
뜨거운 사람을 잊지 않으려고 걷는 일 사이로
체온이 돌아오고 있었다
징조처럼 징조보다 징후처럼
징후보다 난데없는 당신처럼, 기후처럼
눈에는 내륙과 해양이 있어서
한쪽 눈에서 내륙성 소나기를 만나면
다른 눈에서 2미터 파고가 발생했다
애꾸눈 인형을 생각하며 서쪽을 태웠다
그리고 해 짧은 서쪽으로 갔다
무엇 때문에 사느냐고 묻지 않아서
소나기가 내릴 것 같아
한때 품에 안았던 인형을 생각하며
겨우 서쪽이나 태우는 일
모를 일들이 닥쳐오고 있다
- 「소나기」 전문
빵을 먹다가 빵으로 집을 짓고 싶어졌어
빵으로 만든 벽돌과 빵으로 만든 타일
빵으로 얼굴 다른 남편을 매일 구워내는
회색 구름이 스틱 빵으로 세운 굴뚝을 훔쳐가는
벽돌이 조금씩 바스러져도 입술이 오래 향기로울
아몬드를 넣어 구우면 구운 아몬드가 열리는 집
호박을 넣어 구우면 구운 호박이 담벼락을 타고 오르는
그 시멘트 빵이 두 손가락 사이에 잡히면
빽빽한 도회지의 벽들과 세상의 모든 길이 몰려와
빵 속으로 길이 생기는
빵을 먹다가
오븐의 온도를 골목의 온도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 같아
왔던 길을 구워서 딱딱한 과거라고 빵 이름을 써 붙이면
거기 우리였던 그들이 타인처럼 서 있을 것 같아
라떼에 빵을 찍어 먹으며 빵 냄새 가득한 창가에 앉으면
창문도 투명하게 굳어 그 집 풍경이 다 보일 것 같아
- 「빵을 먹다가」 전문
이 집은 새가 절반입니다
벽은 날개이거나 접힌 새입니다
벽이 사진 뒤에 있어도 새입니다
사진 속 사람들은 걷거나 뛰거나 제자리 걷기를 합니다
벽에 딱 붙어서 합니다
가끔은 사진 밖으로 나오려 합니다
검은 깃털이 층층 쌓이는 이 방에서
사진 속 사람들이 하나같이 신을 벗으려 합니다
신은 한 번도 새가 밟은 적 없어 영원히 깨끗합니다
새가 날아가면 집은 무너집니다 패각처럼
그 전에 기차가 지나갑니다
기차가 지날 때마다 새의 날개가 움찔합니다
집 앞이 철길이어서 새는 기다림에 익숙합니다
가끔 기적이 울리면 새는 날개를 폈다 접습니다
새가 날아가지 않아서 사진 속 사람들은 영원히 젊습니다
기차가 지나갈 때 날아온 먼지는 새의 검은 깃털에 앉습니다
새가 기다리는 것이 먼지일까요? 벽은 새입니다
- 「새의 절반」 전문
| 차례 |
시인의 말
1부
무등산에는 등이 있다·13
코드를 잡는 잠·15
어깨들이 저린 벽·17
염소와 시인·18
오동나무 배꼽·20
화이트홀·22
소나기·24
술 빛·26
신과의 거리는 유리 기둥보다 가깝거나 멀거나·28
모자와 모자란 시·30
긴 목을 가진 골목·32
청바지를 입자고요·33
모넴바시아·34
스패너·36
심해의 채도·38
얼음보다 물이 뜨거운 이유·39
2부
본 적 없는 말·43
물의 아파트·44
와, 위·46
와인·48
반짝이는 것들·49
밑줄을 긋는 버릇·50
빵을 먹다가·51
텅스텐을 만지는 기분 정도·52
6일 동안의 키스·54
꿈의 수열·55
달걀을 이해하는 밤·56
새의 절반·58
삼조 씨·59
아르테미스의 생각·60
3부
요일을 바꾼 사람·63
가로등·64 모퉁이에 새가 산다·66
오오따 호수·68
오월의 편지·70
비의 뒤·72
노르웨이 낮달·74
최만흥·76
아벨서점·78
카프카의 편지가 있는 책장·80
손과 패·81
아몬드·82
벚꽃 카페·84
경도(經度)·86
4부
계단·89
나이프가 있는·91
송도·94
민소매 기분·95
카메라를 꺼내며·97
다정에 대한 일반적인 표현·98
화상·100
방재실의 전화·102
나에게로·104
태양은 언제나·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