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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오해’와 ‘사랑’이라는 말의 무게가 묵직하게 다가왔다. 물론 이것은 시인이 그동안 환원해 온 침묵에서 비롯된 개인의 언어일 것이다. 가장 내밀한 영역에서 비롯된 이 말들은 쉽게 짐작하기 어려운 무한한 시간을 내포한다.
그럼에도 시들을 읽어보면 그때의 무수한 엇갈림이 얼핏 스치는 것 같아서 마음 한 곳이 저리기도 했었다. 예전에 들었던 그때 그 말이 알고 보니 전혀 다른 뜻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느낄 법한 쓰라림 같은 것이었다. 감정의 여백은 오해를 환하게 꽃 피우지만, 어느 순간 무심하게 다시 져버린다. 그것을 바라보는 누군가는 그 여백을 통해 비로소 사랑의 무게를 느낀다.
김은상 시인의 시에서 느껴지는 의미가 남다른 것은 마치 “아라베스크”(서시)라는 기이한 무늬를 보는 것처럼 시들이 품고 있는 의미의 층위가 상당히 놀랍도록 두텁다. 어떠한 각도로 보더라도 특유의 색과 무늬를 엿볼 수가 있게 되는데 어떤 때는 시에서 “가장 희미하게 손금을 밝히는 색”을 발견하기도 하고, 문득 “바람에 올라탄 왼손의 온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시인의 손끝으로 시작된 언어와 의미의 불가피한 동행에서 끝은 과연 있는 것일까. 차갑게 펼쳐진 페이지 너머의 끝은 과연 무엇이 자리 잡고 있을까. 시인에게 죽음은 그저 생물학적인 죽음이 아니라, 생 너머의 또 다른 생을 꿈꾸는 존재적 사건이다. 그리고 죽음은 다름 아닌 시적인 상상으로만 열리는 무한한 영역이다.
문학은 침묵의 언어를 가진다고 한다면 적어도 죽음, 사랑, 문학에는 끝이란 없다는 뜻일 테다. “생의 절박함”(「돌 속의 바다」)이 진정 “오해”에서 자라난 것이었다면 생은 여전히 끝나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오해의 완전한 종결이야말로 불빛의 소멸이고, 의미의 소거이며 진정한 죽음이기에. _해설(정재훈 문학평론가) 중에서
시인의 말
친애하는
나의
아버지에게,
시집 속의 시 두 편
꽃 진 자리
꽃이 마음인 줄 알았는데
꽃 진 자리,
그 아득함이 마음이었다
외롭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는 그 말이
저기 저곳에서
꽃이 지고 있다는 뜻인 줄 알지 못했다
내 안의 내가 흘러넘쳐
어쩔 줄 몰라하던
이명,
겨울이 오고서야 알았다
외로운 사람과
그리운 사람의 입술이
서로의 손에 호, 호,
입김을 채워줄 수 있는 다정이
성에꽃 찬란함이라는 것을
꽃의 내륙에
바람의 내륙을 담고서야 알았다
외롭다는 말과
그립다는 말의 때늦음이
겨우
계절이라는 것을
사랑 그 후,
서성이며 일렁이며 불어오는
매미의 빈 날개를
촛불 속에 적시며 알게 되었다
마음, 마음,
온 생을 다해
울어대는
꽃 진 자리,
그 아름다운 여울을
목련의 방
그녀의 눈망울에 달이 차오르고 있었다.
저녁이 환해질수록
점점 작아지던 그녀의 방.
목련이 피어나고 있었다.
백태 안쪽 가만히 귀를 대보면
눈물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옆집보다 야트막하게
대문 쪽으로 머리를 수그리고
코흘리개 아이들을 품고 있었다.
수레를 끄는 그녀의 등이 낡은
지붕으로 휘어져 가는 사이
아이들은 얼굴보다 큰 뻥튀기를 깨물며
흙벽 모서리에 난 구멍을 긁었다.
술에 취해 밤의 목덜미에 칼끝을 대고
새벽을 엎지르는 아비를 긁는 것인지.
그런 악천후를 피해 돌아오지 않는
이역의 어미를 긁는 것인지.
철없이 벽은 긁을수록 환해져,
커져 가는 햇빛과 엉켜
킥킥대며 방바닥을 뒹굴었다.
봄을 향한 나무의 비명이 꽃이라면
고통은 적멸에 가닿는 생의 환호일까.
수북이 쌓인 폐지 속에 숨었다가
세상보다 아득한 온기에 몸을 말고
스르르……,
눈을 감아버린
어린 고양이들의 잠.
곪은 달은 아물었다
덧나기를 반복하며
목련나무 가지 위에서 부풀었다.
혹 월식이 그리워지는 그믐이면
그녀는 명치끝에 고인 울음을
마른 밥그릇 떨어뜨려 설거지했다.
닦을수록 그늘이 깊어지는 꽃의 이명,
화들짝 달무리가 붉게 물들고 있었다.
아무도 깨지 않은 목련의 밀실이 있었다.
차례
1부 꽃잎 속에 잠든 무당벌레는
또 어느 꿈속을 날아가야 하는가
꽃 진 자리 19
서시 22
어떤 형제들 24
하이델베르크의 윤리학 31
소년이 흰 개에게 보여주는 출사표 34
편식 36
비미학 39
즐거운 나의 집 41
저수지 43
무당벌레의 잠 45
지옥에서 버려진 개 47
2부 어느 숲속의 나무 아래
거위의 눈처럼 잠들어
명치 53
서정시집 54
하늘로 흘러가는 하지정맥류 56
폐가 58
반가의 사유 60
천칭 62
새의 국경 64
개종 66
거위의 간 68
고무 외투 71
하이델베르크의 고독 72
3부 눈을 감고 떠난 짐승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경성지련傾城之戀 77
메나드Ménade 78
히키코모리아 80
딸기바닐라 하우스 82
오르골의 노래 84
괄호증후군 87
아니 무는 세계 91
봄의 환상통 94
나비의 잠 96
선캄브리아 98
길고양이 미미 100
4부 나의 시가
노래가 될 수 있다면
비정성시悲情城市 105
목련의 방 117
이방인 120
내연 122
한여름 밤의 서정곡 124
수전증 128
돌 속의 바다 130
지구는 누가 밟고 간 얼룩일까 134
변선구 136
첫사랑 138
지구를 굴리는 자전거 140
해설 _ 차갑게 쓰인 페이지 너머의 온기 143
정재훈(문학평론가)
저자 약력
김은상
2009년 『실천문학』 등단. 시집 『유다복음』(한국문연, 2017), 『그대라는 오해를 사랑하였다』(상상인, 2024). 소설 『빨강 모자를 쓴 아이들』(멘토프레스, 2019), 『나의 아름다운 고양이 델마』(멘토프레스, 2019)가 있음.
75eu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