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가능주의자가 되려 합니다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믿어보려 합니다”
엄혹한 현실 앞에 말려드는 입술에도 불구하고,
희부연 안개로부터 동틀 새벽을 불러내는 시
문학동네시인선 167번째 시집으로 나희덕 시인의 아홉번째 시집 『가능주의자』를 펴낸다.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후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시를 조탁하고 정제해온 시인의 시적 물음이 더욱 깊어진 시집이다. 나희덕은 세계의 암흑을 직시하는 시의 역할을 다시 심문하는 가운데 가려진 이들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가장 최전선의 언어를 새롭게 펼쳐 보인다. 시야의 사각을 꼬집어 지워진 이들이 도드라지도록 하는 이번 시집 안에는, 비로소 소리 높이는 유령들과 함께 뻗어나가는 가능성들로서의 시편들이 2020년대가 열어젖혀야 할 다음을 분명하게 속삭이고 있다.
박테리아와 바이러스는
마침내 가장 두려운 신이 되었다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지나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툭툭 쓰러지는 위력 때문에
인간이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은 존재라는 걸 보여주기 때문에
박테리아와 바이러스에게 마음이 있다는 증거는 없지만
가장 오래되고 지적인 이 존재는
일찍이 영원불멸할 수 있는 비밀을 터득했다
무언가 얻으려면 무언가를 버려야 해
우리가 포기한 것은 독립성,
대신 어떤 생물에도 깃들 수 있게 되었지
세상에 편재하게 되었지
억조창생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된 거야
_「어떤 부활절」에서
2020년대가 시작되며 우리에게 찾아온 것은 “박테리아와 바이러스”였다. 문명이 펼쳐놓은 관계망을 따라 인류의 오만함을 한껏 비웃으며 창궐한 팬데믹 앞에서 사람들은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은 존재”에 불과했다. “이토록 무방비하게 전염”되며 끝을 모르는 듯이 거듭되는 재난을 직면하여 우리가 피부로 절실히 느낀 것은 “인간이 비인간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 결국 예외 없이 하나로 연결된 우주 속에 살고 있다는 것”(평론가 최진석, 해설에서)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절망으로부터 벗어나 내일을 기약하기 위해 살펴야 하는 존재야말로 ‘비인간’들일 것이다. 시집에서는 가시적인 세계로부터 가려진 채 잊혀가는 이들이 비로소 존재를 되찾는다.
사람들은 우리를 보지 않는다
빗자루만 본다
대걸레만 본다
양동이만 본다
점점 투명해져간다
우리를 사람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_「유령들처럼」에서
이번 시집에서 나희덕은 독자에게 불쾌감과 불편함을 적극적으로 느끼기를 제안한다. 편재한 소외와 부조리를 모르는 채로 살면 평안할 수 있지만, 인간은 정녕 그렇게만 지낼 수 있는가? 누구도 혼자 존재하지 않으므로 타자와 함께 사는 삶의 좋음에 각자의 안녕이 달려 있다. 허나 ‘유령’과도 같이 지워진 존재들이 “유서를 남기고 사라진 후에야” “사람들은 간신히”, 아주 잠시 그들을 볼 뿐이다. 그러니 유령들이 진정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존재를 환기하고 오래 남기는 문장이 필요하며, 그들이 그들일 수 있게 할 언어가 필요하다. 우리에게 잊힌 존재들을 융기시키는 것이 바로 시의 가능한 역할이자 의미라고 시인은 호소한다.
시집의 2부와 3부에서는 구체적인 유령들을 호명한다. “이 땅에 30년 넘게 갇혀 있는 장기수가 이렇게 많다는 사실”(「선 위에 선」)을 말하고, “죽음의 무진장”이자 “답할 수 없는 질문의 무진장”(「묻다」)인 광주를 떠올리며, 4·3의 “피붙이 잃은 울음소리”와 “젖 보채는 울음소리를”(「이덕구 산전」) 듣는 화자는 용산 참사의 흔적이 말끔히 가신 곳에서 “너무 늦게 죽은 사람들을/ 너무 일찍 잊어버린 사람들 속에 오래 서 있었다”(「너무 늦게 죽은 사람들」). 마치 세월호의 “어떤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어떤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이들은 “가장 확실한 시각적 방역을 위해”(「사라지는 것들」) 노숙자들을 지우려 한다. “탄소 발자국”(「장미는 얼마나 멀리서 왔는지」)을 따라 점차 “사라져가는 얼음덩어리로부터”(「빙하 장례식」) 온 우리가 바로 다음 차례라는 것을 모르는 채로. 시인은 아프가니스탄의 난민들을 마주하며 “피난의 장소마저 잃은 사람들은 어디로 가야 하”(「피난의 장소들」)는지 묻는다. 이와 같은 총체적인 방향 상실에도 불구하고 부정의 맨 마지막에서 시인은 우리의 기원으로 다시 돌아가 시작할 수 있는 의지를 발굴한다.
우물이 말라버리고
땔감과 기름이 떨어져버린 날에는
도무지 어찌해야 하나
바람 속 지푸라기처럼 떠나는 것
그러나 출구를 찾지 못하고 다시 돌아오는 것
점점 나빠지는 세상을 향해 문을 닫는 것
여섯째 날의 어둠을 받아들이는 것
어둠을 끝까지 응시하는 것
날감자를 쥐고
날감자를 쥐고
_「토리노의 말」에서
“이 자욱하고 흥건한 시대를 시는 어떻게 건널 수 있을까.” 제사에서 시인은 이렇게 묻는다. 나희덕의 시는 우리가 처한 세계의 메마른 땅과 척박한 현실을 고발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맞닥뜨린 상실과 부재가 더욱 도드라지도록. 그러나 절망을 말하는 자는 끝내 낙관을 저버리지 못하는 자이기도 하다. 그의 시는 희부옇게 가능성을 내비치는 각오이자, 다가오는 어둠을 향해 기꺼이 스스로를 내어 미는 것으로 다음을 도모하고 있다.
어떤 틈도 없이 꽉 막혀 있는 듯한 시야에도 불구하고, 막다른 길로서의 끝은 미래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아직 무언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어떤 어둠에 기대어 가능한 일일까요”(「가능주의자」). 나희덕은 가능성이 가장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어둠으로 나아가 그로부터 빛을 길어낸다. 어쩌면 이는 자명한 진리일지도 모른다. 한번 끝까지 간 사람이 그다음을 캐낼 수 있을 터이므로. 아직 덜 부정한 자에게 남은 것은 부정일 뿐 긍정이 아닐 것이므로. 지독하게 회의하는 자만이 희망의 조각을 발견할 수 있을 터이니. “불가능성, 그 단절의 심연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어떠한 가능성도 가능하지 않으리라. 결여가 있기에 채움이 있는 게 아니라 채움이 있기에 결여가 있는 것이니, 불가능성은 가능성의 조건이지 그 반대는 아니다. 그러니 가능주의자가 되자. 그로써 불가능한 시작의 미-래를 한번 더 끌어당겨보자.”(평론가 최진석, 해설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가능주의자가 되려 합니다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믿어보려 합니다
큰 빛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반딧불이처럼 깜박이며
우리가 닿지 못한 빛과 어둠에 대해
그 어긋남에 대해
말라가는 잉크로나마 써나가려 합니다
_「가능주의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