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고 울까요.
저는 그저 그리워하는 직업을 가졌을 뿐인데요.”
육체에서 세계로 나아가는 걷기의 시학
눈물이라는 형태의 존재의 춤
문학동네시인선 166번으로 이재훈 시인의 네번째 시집을 펴낸다. 1998년 『현대시』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재훈은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명왕성 되다』 『벌레 신화』 등의 시집을 통해 원시적 감각에서 신화적 상상으로 나아가는 시적 세계를 구축해왔다. “세상의 추위를 외면하지 않고 스스로의 온기로 견디겠다는 엄결한 자세를 버리지 않은”(장은수) 시인의 언어는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도주하는 꿈의 언어들이 아닌 현실을 견디기 위한 꿈의 언어들”(정재학)이다. 그간의 작업들에서 비극적인 현실을 살아내기 위해 환상적 언어로 고통을 끌어안는 방법을 택했던 시인은 이번에는 슬픔을 물질처럼 붙잡고 그것을 오래 들여다본다. ‘생물학적’이라는 표현처럼, 그가 들여다보는 순도 높은 슬픔은 일상적 언어를 통해 지극히 육체적인 것으로 환원되어 자신의 일부가 된다. 그러니 『생물학적인 눈물』에 수록된 62편의 시는 우리의 삶이 환희로만 가득찬 시간이 아니라 고통과 괴로움을 동반한 시간이라는 자각, 그리고 그 고통과 괴로움은 결코 우리를 좌절시키거나 포기시키려 찾아오는 고비가 아니라 다른 차원의 삶을 열어젖히는 과정에서 우리가 마주해야만 하는 생의 빛일 수 있다는 힘겨운 선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른 비가 하늘을 덮는다.
바닥에 납작 엎드린다.
물의 더미에 몸을 맡긴다.
세상 풍조가 살결에 새겨진다.
(……)
만져야 하고 맡아야 하는 바람이
물속까지 숨을 불어넣는다.
유신론의 시대가 오고 있다.
_「넙치」 부분
시집의 문을 여는 첫 시는 넙치라는 생명체를 통해 신에 다가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하늘 가장 높은 곳에서 떨어지기 시작한 비가 바닷속 가장 밑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는 존재에 닿을 때, 바람이 물속까지 숨을 불어넣고 세상의 풍조가 그 가장 낮은 생명체의 살결에 새겨질 때, 화자는 어쩔 수 없이 신을 느끼고 유신론의 시대가 오고 있음을 예감한다. 말할 것도 없이, 바닥에 납작 엎드린 넙치는 세상 풍조를 살결에 새기며 살고 있는 우리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안개는 다시 태어난다는 약속도 없이 천천히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진다. 안개를 온몸으로 먹고 슬픔은 기지개를 편다. 서럽게 아름다운 문장이다.
_「누대(屢代)」 부분
같은 시의 “슬픔을 고이 접어”둔다는 표현처럼 시인은 슬픔을 아낀다. 이재훈에게 슬픔은 흘러가는 감정이 아니라 마주해야 하는 물질이다. 슬픔을 물질화한다는 것은 그것을 문제화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물질로서의 슬픔은 쉽게 해소되거나 매만져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인은 말한다. “이해할 수 없는 슬픔도 있”(「저에게 두번째 이름을 주세요」)다고. 같은 시에서 시인은 슬픔을 충전시키는 안개에 대해 “세계에서 가장 흔하고 아름다운 물질”이라고도 말한다. 이에 비추어보면 슬픔은 어떤 아름다움과 인접한 종류의 물질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온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이해를 넘어서는 아름다운 것. 슬픔에 대한 이와 같은 시인의 이해는 삶에 대한 그의 이해이기도 할 것이다.
오직 생존만이 도덕인 바다의 꿈틀거림.
미래를 점칠 수 없는 계절이 계속되고
가장 알량한 회개가 마음을 헤집는다.
수면 위로 솟구쳐올라 바위에 온몸을 부딪치는
눈물벼락.
남몰래 땅속을 흐르는 물주머니가
천둥처럼 얼굴에 달라붙는다.
_「생물학적인 눈물」 부분
안개가 시인에게 아름다움을 표상한다면 바다는 “오랜 사랑”이 없이 “도륙과 생존”만이 존재하는 비상구 없는 몰락의 공간이다. 그러나 “미래를 점칠 수 없는 계절이 계속되고/ 가장 알량한 회개가 마음을 헤집”어도 시인은 바다로 향하는 발길을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아마 그 바다가 구도의 길 끝에 마주한 본인 자신의 내면이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은 이 시에서 물질에서 감정으로, 감정에서 물질로의 전환을 이미지화하고 있는데, 꿈틀거리는 ‘바다’가 헤집어지는 ‘마음’으로, 그것이 바위에 온몸을 부딪치는 ‘눈물벼락’으로 전환되는 과정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이 시의 제목이자 시집의 표제이기도 한 ‘생물학적인 눈물’이라는 표현은 좀더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시인은 나도 모르게 내 안에서 흘러나오는 반응을, 그 움직임의 순도를 극히 자연스러운 육체의 것으로 명명하고자 한 듯하다. 그것은 스스로가 관념의 영역에서 벗어나 실체를 가진 존재로서 현실의 자리로 가닿기 위한, 그럼으로써 삶의 고통과 슬픔을 피하지 않고 여실히 감각하고자 하는 시인의 필사적 각오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재훈 시의 주체는 걸으면서 다채로운 감정에 휩싸이고 또 걸으면서 사색하며, 그리고 걸으면서 무언가를 구한다. (……) 걸음은 한 호흡을 다른 호흡으로 옮겨놓는 일을 한다. 이 호흡의 전환 속에서 우리는 슬쩍슬쩍 다른 세계의 기미를 엿보는 비약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게 된다. (……) 어쩌면 저 전환과 비약이야말로 이재훈이 걸으면서 시를 쓰는 일을 통해 꿈꾸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일은 마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메마른 현실을 무수히 통과하는 과정을 몸소 겪고 통과해야만 한다는 차가운 사실 또한 우리는 안다. 그 한 순간에 도달하기 위해 시인은 호흡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고 감정을 바꾸는 지난한 과정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_송종원, 해설 「걷기의 시학과 사제의 눈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