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천 시인, 신작 시집 『노자의 블랙홀』 발간
노자는 어디로 가는가
현란하고 자유분방한 시적인 미토스
박제천 시인의 17권째 신작 시집 『노자의 블랙홀』이 문학아카데미시선 315번으로 출간되었다. 이 시집은 특히 박제천 시인의 시와 고창수 시인의 사진예술이 합해진 콜라보레이션 작업의 결실이다. 따라서 시집은 화보와 본문으로 크게 나뉘어 각각 제1부 <시계의 추억> 제2부 <호수의 신화> 제3부 <두 세상이 서로 만날 때> 제4부 <기억의 흔적> 제5부 <너는 어둠이다> 등 전5부작 38편을 수록하였고, 제6부 <시인의 에스프리>에는 송희복 평론가(진주교대)와 안승우 시인(강릉원주대)의 해설을 통해 시집의 의의와 특장을 살펴보았다.
새 시집 『노자의 블랙홀』을 선보인다. 처음부터 노자에 초점을 맞추어 기획한 지 3년만의 결실이다. 근 60년여에 걸친 내 시는 노장과 불교에 대한 사유와 상상력으로 점철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노장에 대한 집착은 연작시 『장자시』와 시집 『노자시편』으로 한 고비를 이루었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발표한 지 3,40년이 넘어섰기에 저들이 한생애에 걸쳐 꿈꾸었을 우주자연의 장대한 시를 또다른 각도에서 소개하고 싶었다. 아니, 나 자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우주자연의 노래와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다. 해설을 맡아준 송희복 교수와 안승우 교수의 도타운 우정에 고마움을 표한다. 읽는 분들의 따뜻한 지지를 바란다.
―박제천 서문
고창수 시인의 사진작품에서는 살바돌 달리풍의 몽환적인 현실과 신화풍의 우주적 상상력이 분출하고 있었다. 영상미가 회오리구름처럼 흘러 넘치는 그 상상력은 보기만 해도 신명이 넘쳐 흘렀다. 이때 섬광처럼 노자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천년 전에 나귀를 타고 떠난 그가 아직도 블랙홀로 가고 있다는 설정이었다. 노자를 대입해 본즉 고창수 선생의 사진은 한순간 노자를 위한 잔치상으로 바뀌었다.
―박제천(시인, 문학아카데미 대표)
별들에게 이름을 붙이고, 이 이름을 밤새 호명하고, 별들이 머문 마음의 자취와 자리를 살펴보고, 별에서 오는 숨소리와 바람소리를 느끼고, 별들의 여자를 되찾겠다는 것은 시인 박제천이 밤하늘에 아로새기는 현란하고 자유분방한 시적인 미토스(mythos)이다. 시인들이 지니고 있는 시적, 혹은 신화적인 상상력 역시 서양의 점성술사나 동양의 역술가처럼 천지간의 상응성을 연역하는 직관의 능력이라고 하겠다. 시인 박제천은 이런 점에서 시적인 점성술사요, 신화적인 역술가라고 할 것이다.
―송희복(문학평론가, 문학박사, 진주교대 교수)
『노자의 블랙홀』은 노장사유를 비롯한 동양사유가 그 내용과 형식에서 얼마나 현대적으로 진화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또한 형식과 외면, 이름에 갇혀 있던 본연의 우리 내면이 지닌 무한한 가능성을 들여다보게 한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예술의 본질 추구를 위해 예술 장르 간에 한마음으로 조화를 이룰 수 있음을 무한히 상상하고 체험하게 한다.
―안승우(시인, 유학박사, 강릉원주대 교수)
▶박제천: 서울 출생. 동국대 국문과. 1965~66년 『현대문학』 등단. 시집: 『장자시』 『달은 즈믄 가람에』 『나무 사리』 『천기누설』 『풍진세상 풍류인생』 등 17권. 저서: 『박제천시전집(1,2차 전10권)』 『시를 어떻게 고칠 것인가』 등. 수상: 한국시협상, 공초문학상, 동국문학상 등. 현재 문학아카데미 대표. munhakac@hanmail.net 전화)010-3723-6237
▶고창수: 함남 흥남 출생. 성균관대학교 영문과(대학원 문학박사). 한글/영어 시, 영역 시가 한국, 미국, 캐나다 등 문예지에 발표됨. 사진 작품이 대한민국사진축제 등 단체전 및 개인전에 출품됨. 영화 작품이 부산국제영화제, 미국 Charleston 국제영화제, 일본 Tokyo Video Festival 등에서 수상함. kochangsoo@hanmail.net
▶문학아카데미: 03084 서울시 종로구 동숭4가길 21, 낙산빌라 101호. 이메일) munhakac@hanmail.net 764-5057 fax) 745-8516 ▶B5판·반양장 108쪽/ 값 10,000원
<좋은 시>
1―1
오늘밤에도
밤하늘에서
아버지 대장간 신을 만났다
불물이 들끓는 화로에서 집어올린 불점들,
모루에 올려 다듬은
푸른 시침 붉은 분침을
밤하늘의 문자판에 새기는
아버지 별,
밤하늘 여기저기 흩어진 별들의 조각보를 이어
무릎담요를 만드는
어머니 별,
그 아래 누이며 형들의
깜박이별들도 보인다
2―1
밤이면 하늘 바다를 퍼와서
내 안에
신화의 호수를 만든다
어젯밤엔 프루시안 블루를,
오늘밤엔 오로라를 퍼와
무지개 범벅을 만든다
달도 별도, 신선도 선녀도,
사천왕도 금강야차도
미륵이며 나한도
다같이 한몫을 한다
그렇게 만든 내 안의 호수엔
물푸레나무가 자라고,
물푸레나무는 아홉 세계와 33천을
하나의 뿌리로 연결하는 우주목이 된다
5―1
너는 어둠이다
너는 길, 너는 이름,
너는 투명의 문이다
보이지 않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무문관의 어둠,
무문관의 이름이 다시 문이 된다
너에게 이름을 붙이면 그 이름은 이미 네가 아니다
이름없음으로써 너는 비롯된다
이름함으로써 모든 것이 네게서 태어난다
5―5
푸른 소 엉덩이에 지즐탄 저 사내
여덟 자 여덟 치 늘씬도 하지
세 겹 귀, 큰 눈, 모난 입, 두터운 입술,
성긴 이빨, 누런 눈썹, 넓은 이마, 눈빛도 부셔라
어디로 가나, 서쪽 땅으로 뚜벅뚜벅 무너진 성을 타고 넘네
어미 뱃속에서만 81년, 마침내 배나무 아래
어미의 오른쪽 겨드랑이를 통해 세상에 나섰네
한 2백년, 사람들 사는 꼴
기둥 아래 서서 적어두다가 너무도 심심해설까
훌쩍 소엉덩이에 올라탄 채 서쪽으로 가는구나
가는 것도 아니고, 멈춰 있는 것도 아니고
바람부는 대로 바람에 실려 그렇게 가는 것처럼
서쪽으로 가는 것처럼 보이네
이 모두가 내 간절함 때문인가
오늘도 가고 있는 늙은 사기꾼의 기막힌 솜씨
5―7
노자에게 묻는다 내가 너에게 길을 가르쳐 주랴
너를 살아남게 하는 이름의 길을 가르쳐 주랴
나도 너도 이름이 없었고 길도 없었던
그 아득한 나라를 가르쳐 주랴
그 나라에는 누가 꿈꾸지 않더라도
누가 들여다보지 않더라도
사람을 꼿꼿하게 세우는 꿈의 뼈와
사람이 그 무엇의 이름인지를 기억케 하는
어둠의 피가 들끓고 있다
내 너에게 이 아침의 이슬 한 방울을 주랴
그 속에서 땀흘리는 너의 삶을 보여 주랴
내 너에게 이 저녁의 바람 한 끼를 주랴
이렇듯 네 시장끼를 달래면
딴세상으로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겠느냐
이 앞에 열려진 저 문으로 가는 이름
저 문으로 들어서서 만나게 되는 이름을
네 것으로 가질 수 있겠느냐
5―8
노자는 나에게 나는 노자에게 이렇게 묻고 또 묻는다
우리는 뻐끔담배 연기를 구름처럼 피어올리며
또다시 이 하루를 다스린다
늙은이여 어찌 네가 바로 길이고 이름이고 문이란 말인가
늙은이여
너는 푸른 소가 아니라, 처음부터 용을 지즐타고, 가야 했다
은하 3만리는 아직도 은하 3만리,
늙은이여, 블랙홀은 은하 3만리가 아니라
너와 나의 가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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