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모서리는 뭉뚝하다 -김준철 시집
(천년의 시작. 시작시인선 380 )
책소개
김준철 시인의 시집 『슬픔의 모서리는 뭉뚝하다』가 시작시인선 0380번으로 출간되었다. 시인은 『시대문학』 시 부문 신인상, 『쿨투라』 미술평론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꽃의 깃털은 눈이 부시다』 『바람은 새의 기억을 읽는다』, 전자시집 『달고 쓰고 맵고 짠』 등을 출간한 바 있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불면증에 시달리는 자의 고통을 처절한 자기 고백을 통해 시적으로 승화시킨다. 반복되는 불면의 밤은 시인으로 하여금 자의식을 고조시키는 한편 시를 쓰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여기에는 삶에 대한 비애와 극도의 불안이 깃들어 있으며, 이는 낯선 시적 이미지와 분위기를 이끌어 낸다.
한편 이번 시집에서는 가족 서사가 유독 눈에 띈다. 시인은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가족 관계에서 초래된 슬픔을 묘사하는 데 상당한 공을 들인다. 파편화된 기억의 조각을 낯선 이미지와 언어의 배치를 통해 재구성함으로써, 미학적으로 완성도 높은 시 쓰기를 보여 준다. 해설을 쓴 방민호(문학평론가, 서울대학교 국문과 교수)의 말처럼, 시인은 “균열된 가족의 끔찍한 기억으로부터 아직도 자유롭지 못”한 상태이며, “여전히 고통과 어둠의 힘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지만, 이 때문에 오히려 “자신의 실존적 조건을 있는 힘껏 응시하”게 된다. 우리는 불행의 끝을 예리하게 의식하는 시인의 시선에서 삶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요컨대 불면증으로 인한 고통은 시인에게 사물을 새롭게 바라보고 인식하게끔 하는 ‘창’이 되어 주며, 반복되는 일상에 대한 성찰과 새로운 해석을 가능케 하는 ‘힘’이 된다. 추천사를 쓴 이재무 시인의 말에 따르면, 이번 시집은 “블랙코미디 같은 잔혹하고 통렬한 자기 풍자와 우울한 해학과 알레고리가 주조를 이루고 있”으며, “고통으로 점철된 가족 서사”가 읽는 이로 하여금 “감정의 홍수에 휩싸이”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이처럼 이번 시집은 예기치 않은 곳곳에 시적 개성과 표현력이 빛나는 시들을 숨겨 두고 있으며, 나날의 일상에서 삶의 경이로움을 발견하는 기쁨을 시적으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문학적 발자취를 남긴다.
저자
저자 : 김준철
시집 『꽃의 깃털은 눈이 부시다』 『바람은 새의 기억을 읽는다』, 전자시집 『달고 쓰고 맵고 짠』 출간.
『시대문학』 시 부문 신인상, 『쿨투라』 미술평론 신인상 수상.
미주한국문인협회 회장. 월간 문화예술전문지 『쿨투라』 미주지사장.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그러나… 글썽이는 파랑
낮달은 밤에 속한다 13
슬픔이 슬프다 14
파릇한 너를 지웠다 16
불 지른 기억이 있다 18
나비의 봄 20
읽히는 시간 21
서성이다 멈춘 잠 22
지금은 없다 24
개인기 25
끄덕끄덕 26
꽃을 청하다 27
온기로 오다 28
그늘이 선명해지는 시간 29
늙어 가며 당신에게 30
제2부 하물며… 흘러나온 빨강
우리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간다 35
사랑, 부르다 36
길을 잃지 않은 낙타가 오아시스로 간다 38
달고 쓰고 맵고 짠 40
마른 칼이 슬프다 42
지극히 불안한 43
가구 44
습관을 기념하며 45
등록되지 않은 사람들 46
묻다 멈추다 48
불면이 웃는다 50
아내에게 닿다 51
작작作作하다 52
노인 단상 54
제3부 그러므로… 충혈된 까망
소망사 57
사랑을 앓다 58
하루가 다른 하루를 바라볼 때 60
딱딱한 밤 62
놓아주려다 놓치다 64
아비가 되는 방 66
자위하는 나의 어머니 68
허기를 끌고 70
매일 부활하는 잠 72
죽은 듯 쥐는 살아간다 73
이별 74
박제된 비명 76
가족은 잠들고…… 오전 3시 59분 78
끝기도 80
제4부 혹은, 추락하는 하양
깨어나는 수면 85
불 안 붙인 담배를 입에 물고 86
시간의 방부 처리법 87
바람은 혼자서 88
이몽 89
비밀을 주고 눈을 감았다 90
그와의 귀로 91
너에게 비밀이 생길 때 92
안부를 묻다 94
폐선 95
숯 96
권태로움으로 쓰다 97
꽃잎에 물든 봄 102
피고 지고 서럽고 104
해설
방민호 21세기 이상李箱의 새로운 초상 105
방언같은언어함몰하는기억지난한일상너덜거리는시간눅눅한모서리자멸하는새벽칭얼대는저녁삭제된계절헐렁해진속옷동결된허무메마른밥풀비틀린안경누적된비곗덩이토막난연필모자이크된자판기가파른풍경곰팡이핀사타구니잘려나간매듭죽은책들의옆구리그리고 시 작 하 지 못 한 끝
이 모두
소리 없이 사라져 다음 생에는 시로 태어나지 않길 바랐다
쓰지 못할 거라 생각했고
써서는 안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파지를 만들었다
쓰고 있으면서도
쓰고 있지 않다고 믿었다
이것으로
다시 쓸 수 있기를
청한다
시집 속의 시 한 편
불 지른 기억이 있다
화상처럼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있다
호기심으로 몰래 숨어
성냥을 집어 들었던 순간이 있다
동네 골목길에서
뒷동산이나 공사장 귀퉁이에서
바퀴벌레들같이 모여
언 손과 몸을 녹일
신문지와 나무판자를 모아
깡통에 넣어 피워 올리던 불덩이
매캐한 비밀이 자라 젊은 날 품었던 열기에 대한 기억까지 피워 올렸다 가닿는 모든 것이 활활 타오르는 불이 되었던 때였다 타고 타도 잦아들지 않던 영원히 타오를 것 같던 시뻘건 불길 속으로 나조차도 불이 되었던 무차별한 방화의 시간 환상 따윈 없는
엄지와 검지 끝에 배어 지워지지 않는 냄새
미처 타지 못한 추억이 지문처럼 남아
자꾸 손끝을 코로 가져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