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2005년 시집 『숨소리』로 등단한 나석중 시인이 2년마다 한 권의 시집을 출간하는 기염을 토하며 여덟 번째 시집 『저녁이 슬그머니』를 출간했다.
산수(傘壽)를 지나 미수(米壽)를 바라보는 나석중 시인은 이번 시집 『저녁이 슬그머니』에서 욕심을 내려놓고 주변의 삶에 좀 더 너그러워지려 한다. 스스로를 내세워 말하기보다 말을 들어줌으로써 상대를 배려한다. 남을 배척하지 않고 품으려는 심경이 나석중 시의 가장 빛나는 지점이다. 시인은 마음을 내려놓음으로써 다른 풍경을 만들어내며, 새로 그려낸 풍경은 담담하면서도 매혹적이다. 시인은 사물의 관찰에서 시(詩)가 될 만한 것들을 기가 막히게 포착하는 안목을 지니고 있다. 그런 안목으로 창조한 세계는 대부분 숙성의 시간을 거친다. 숙성의 방법과 기간에 따라 ‘시의 맛’이 결정되는데, 시인이 선택한 방법은 ‘기척’이다. 사물이 숙성되는 시간을 기다려 조심스럽게 기척을 한다.
나석중 시인의 이번 시집의 시를 대부분 표절이라고 「시인의 말」에서 밝혔다. 그가 대놓고 표절을 했다는데 인위적인 표절이 아닌 주인이 없는 “하늘과 구름”이나 “풀꽃과 나비” 등을 베낀 것이라고 고백한다. 시인은 수시로 자연에 들어 소요(逍遙)하고, 교감(交感)하고, 필사(筆寫)한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자연을 “희언자연(希言自然)”이라 했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말이 드문 게 자연이다. 나석중 시인이 추구하는 시정신도 이와 다르지 않다. “언젠가 딱 한번 써먹었을” 막도장처럼 화려하거나 복잡하지 않은 형상을 하고 있다. “무엇인가를 간직”하거나 채우기보다 버리거나 비우는 일이 더 많아졌다. “허망한 문장”은 태워버리고 사변을 멀리하면서 다시 “백지에서 출발”하고자 다짐한다. 시인은 “동심을 잃지 않”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시인정신”임을 숨기지 않는다.
시인이 베낀 것은 “아침과 저녁”, “일출과 일몰”도 있다. 아침이나 일출보다 저녁과 일몰에 방점이 찍히는 건 어쩔 수 없다. 어스름, 즉 저녁 어둠의 시작인 박모(薄暮)는 시인의 생래적 나이라기보다 정서적 나이나 시인으로서의 위치에 더 가깝다. 아직 사랑할 수 있고, 젊은 시인들보다 좋은 시를 쓸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이다. 일몰 후 잠시 밝고 푸른 박명(薄明)이 지난 시간이 어스름이다. 땅거미라고도 하는 조금 어둑한 시간이 지나면 금방 밤이 찾아온다.
“의무를 마친 것들은 아름답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인식하기에 “어스름을 입은 저녁이 슬그머니” 다가와도 “후회할 저녁”은 아니다. 다만 “가만히 다가가/ 지팡이처럼 기대고 싶은 마음”과 그 마음에 “기대어 하루쯤 울어도 다 받아줄” 것 같은 너그러운 품이 그리울 뿐이다. 이제 “가도 가도 되돌아올 수 없는” 길이면서 “역류할 수 없는 시간”이다. “괜한 서러움으로” 꽃을 봐도, “먼 데를 바라”봐도 눈물이 난다.
이번 시집 『저녁이 슬그머니』에 눈물이 종종 등장하는 것은 “고향에서 부르면 탕아처럼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고, 인생의 어스름에 “허물 벗는 참회”의 심정 때...문이다. 누구나 세상에 혼자 왔다 혼자 간다. 단순한 여행에서 조금 더 복잡한 여행을 희원(希願)하지만, 인생은 본래 “단독자”인 것이다. “제 갈 길 의연히 가”는 자벌레처럼 “무량 흘러넘치고도 남는” 시가 곁에 있는 한 나석중 시인은 행복한 사람이다.
저자
나석중 저자 : 나석중
시인
전북 김제에서 태어나 2005년 시집 『숨소리』로 작품 활동.
시집 『목마른 돌』 『외로움에게 미안하다』 『풀꽃독경』 『물의 혀』 『촉감』 『나는 그대를 쓰네』 『숨소리』.
미니시집(전자) : 『추자도 연가』 디카시집(전자), 『라떼』 『그리움의 거리』.
목차
1부 바람의 기원
새의 눈물 · 13
묵은 사과 · 14
저녁이 슬그머니 · 15
여적(餘滴) · 16
바람의 기원 · 17
詩 · 18
막도장만큼이라도 · 19
모래시계 · 20
캠프 · 21
절정(絶頂) · 22
바다를 읽다 · 23
테이크아웃 · 24
누선(淚腺) · 26
상강(霜降) · 27
이단(異端) · 28
간판이 많은 명함은 수상하다 · 29
팬데믹(Pandemic) · 30
거지들이 온다 · 32
2부 작은 꽃
작은 꽃 · 35
꽃 앞에서 · 36
물레나물 · 37
얼음새꽃 · 38
고목(古木) · 39
달맞이꽃 · 40
꽃 · 41
씀바귀 · 42
꽃의 이유 · 43
꽈리 · 44
지는 잎들 · 45
밤꽃 · 46
애기똥풀 · 47
안개꽃 · 48
목련 지다 · 49
억새 · 50
질경이 · 51
석편(石篇) · 52
3부 애월(涯月)에서
애월(涯月)에서 · 55
돌가시나무 · 56
소양강은 흐르고 · 57
추자도를 향하여 · 58
아라리 · 60
청산도 · 61
밀양 · 62
속리에서 속리를 벗다 · 63
양양 · 64
삼괴정(三槐亭) · 65
보라 · 66
마로니에 블루스 · 67
경이로운 독거 · 68
에덴의 서쪽 3 · 69
무이네 연가 · 70
지는 사랑 · 71
연애하고 싶다 · 72
사랑과 분노 · 73
4부 사랑의 수의
아프지 마라 · 77
독거(獨居) · 78
사랑의 수의 · 79
반추(反芻) · 80
모자를 쓸 때 · 81
서녘에 잠기는 저 한 송이 붉은 꽃이 · 82
풍경소리 · 83
순정(純情) · 84
샴페인 · 85
눈 온다 · 86
천둥이 우르르 쾅쾅 · 87
굴신 아니다 · 88
콩나물 · 89
공부 · 90
천당 · 91
불연(不然)인지 · 92
소나무를 아우라 불렀다 · 93
자작나무 인생 · 94
해설 희언자연(希言自然), 소요하고 소유하고 사유하다/ 김정수 · 95
책 속으로
저녁이 슬그머니
어스름을 입은 저녁이 슬그머니 이녁으로 오고
푸르른 봄날 뜬구름에 실려간 황금수틀은 아름다웠네
노란색 일색으로 황사에 흐려지는 눈총을 외면할 수밖에 없는
꽃다지며 산수유며 수선화 물릴 수 없는 봄은 누구의 봄입니까
지난해 바싹 마른 낙엽 한 장이 빈 소리를 굴리는 저녁이 오니
서쪽 하늘을 바라보는 얼굴이 살굿빛으로 물들어도 좋겠습니까
이제 오늘을 다독이며 안아줄 수 있는 내일은 없으니
저녁이 슬그머니 와도 후회할 저녁이 아니오니
[대표시]
묵은 사과
주춤거리던 사과
살짝 칼등으로 사과를 노크한다
단박에 사과 칼날 들이밀면 놀라서
아픈 사과가 되겠지
근육주사를 놓듯 기억을 환기하는 게 좋겠지
묵은 사과가 육향이 짙은 것은
수치와 민망과 미안과 무안이 섞여
한몸으로 푹, 숙성된 때문일까
사과는 좀 더듬더듬 서툴다
사과는 시야가 뚫린 고속도로처럼 탄탄대로로
사과를 받아주지 않겠다는 듯
사과껍질이 과속방지턱을 넘으며
툭 끊기곤 한다
석편(石篇)
고색이 창연한 돌 앞에서
조용히 옷깃을 여미고 좀 경건하자
돌을 돌로만 볼 일이 아니다 이 집안
전래한 돌은 침묵이란 가훈
당신이 그 침묵을 읽었다면
성급하게 결론을 짓지 마시라
적지 않은 돈 들여서 장식장 치장하고
대가인 양 이러쿵저러쿵하지 마시라
혹 침묵을 금으로만 보는 눈이 있다면
그냥 돌은 돌로 볼 일이다
감히 그 연륜을 헤아릴 수 없는
돌을 완독하기에는 일생도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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