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지평선을 바라보며 살고 싶었다
일망무제 수평선만 응시하며 살았던
유년기의 작은 소망
시인의 꿈은 이루어졌다
불혹이 무르익을 무렵 중국주재원 발령을 받았다
푸동공항의 청명절은 녹음이 짙었고
제주도보다 남쪽 상하이의 봄은
여름옷으로 갈아입고 이방인을 반겼다
다시 조국으로 돌아와 모국어로 시를 쓰는 기쁨
귀거래사를 읊는 심정으로 솔숲에 불이 덩그면
시집을 지천명의 장강 하류에서 낸다
고마운 사람들이 많다
험한 세상에 방파제가 되어 준 가족과
잠들었던 시를 개안시킨 김우식 박사
늦었지만 이제 시작이다.
제1부
산에 올라 나무를 만나면/10
꽃 같은 삶이 아니어도/11
너에게 닿아야 하리/12
밥상과 여자/13
하루의 기도/14
그의 의자는 벼랑이다/16
길고양이의 말/17
빗방울 /18
엿 같은 세상이라면/19
미친 듯이/20
하루를 살리는 일/22
친구와 친구/23
플라타너스/24
돼지꿈이라도/25
기념일/26
평온한 멈춤/27
6월은 가고/28
칠월이 오네/29
가을 그 곳에/30
제2부
헐렁한 생각/32
왜 사냐고 묻고 싶을 때/33
24시/34
그대 아시나요/36
내일을 만나려면/38
그 곳 어디?/39
가로등/40
이별/41
후미진 생각/42
주먹에 대하여/43
무제/44
태풍 속의 나무/45
어떤 상황/46
어떤 사람/47
원망은 못해요/48
이유/50
안갯속에 들다/51
하루살이의 일생/52
나만이 나를 아는 것이 나는 슬프다/53
제3부
사랑한다는 것은/56
환절기/57
그대의 마음/58
사랑/59
눈물 나게 하는 것들/60
하늘 그 곳에/61
일탈의 길/62
꿈/63
산수유/64
그 집/65
어느 봄날/66
쑥부쟁이 꽃/67
봄이 아니야 /68
태풍/69
장미 넝쿨/70
어여쁜 꽃이었는데/71
돌아가고 싶은 하루/72
나무의 기도/73
달맞이 꽃/74
제4부
선물/76
그런 사람으로 살고 싶다/77
졸망해지는/78
풀섶에서/79
창밖의 이야기/80
밥/81
철들어 보는/82
길 위에/83
동백/84
호수/85
가재미/86
미안해하지 말고/87
그 여자는 소였지/88
겨울이 떠난 자리/89
안개꽃/90
민들레의 봄날/91
파꽃/92
소소한 표정으로/93
-작품 해설 · 서정의 늪을 건너다 · 김우식
■작품 해설
서정의 늪을 건너다
-황인칠의 시세계
김 우 식(문학박사 · 시인)
인생을 살아가면서 만남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부모와의 혈연의 만남 학창시절의 수많은 친구와의 만남, 결혼과 직장생활에서의 만남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필자는 황인칠 시인과 특목고 동창으로 만나 지금까지 변함없는 우정의 표본이 되고 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뿐 아니라 글과의 만남도 있다. 어떤 글을 읽고 어떤 영향을 받느냐도 중요하다. 특히 시를 만나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수많은 시적 장르 중에서도 서정시와의 만남은 큰 축복이라 생각한다.
빅토르 츠메가치와 디터 보르흐마이어는 서정시의 위대성은 작품에 구체화된 진실성에 근거한다고 본다. 헤겔은 서정시는 주관성의 예술이며, 서정시인은 그 스스로가 주체로서 영향을 받은 것에 대하여 말한다고 하였다.
황인칠 시인은 완도군 신지도가 고향이다. 명사십리 아름다운 천해의 바다와 수많은 섬들 속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면서 자연스럽게 성장했다. 감나무로 만든 배를 타고 전어 잡이로 9남매의 장남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셨던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시고 유년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특목고 진학을 위해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와 먼지나는 신작로 길을 걸어 나왔던 황시인은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나가게 된다. 황인칠 시인의 첫 번째 시집『솔숲에 불이 덩그면』은 삶의 전환점을 돌아와서 다시 태어나기 위한 아름다운 삶의 모습들을 담담하게 담아내고 있다. 망망한 대해와 광활한 중국대륙을 휘돌아 생성된 이 시집의 둘레길을 따라 그가 걸어온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1. 서정의 정체성을 찾아서
황인칠의 시집 『솔숲에 불이 덩그면』에는 고향인 완도 주변에서의 유년의 모습이 여과 없이 보여진다. 수평선보다는 지평선을 그리워하는 소년의 날아오르고 싶은 갈망이 시의 전편에 흐르고 있다. “남해바다 수평선을 넘어 청산도 제주도를 지나면/ 태평양 대해라는 데/ 그 먼 바다를 훌쩍 건너서 오지를 탈출하는/ 고래꿈을 키운다”는 시구는 소년의 기약 없는 꿈이 아프다.
유년시절
배가 고프면 어머니를 따라 밭에 갔다
텃밭 땅에 금이 가면 고구마가 실하게 여물기 시작한다
호미로 살살 긁어대면 굵은 것만 골라서 점심으로
겨우살이는 아침저녁은 보리밥
점심은 고구마가 주식
안방에 고구마 저장하는 곳은 방의 절반을 차지했다
그런데 이제야 고구마꽃을 봤다
그렇게 질리도록 먹었던 고구마꽃을 본 기억이 없다니
나팔꽃 닮은 꽃을 보며
새삼 어린 날 어머니의 호미질을 회상한다
어머니는 할머니가 되어
지팡이가 없으면 마을회관 나들이도 힘든 노인
그래도 고구마꽃보다도 고운
우리 어머니는 박수진
고구마처럼 강인한 여자다
-「고구마꽃」전문
지금은 유년의 추억을 반추하는 글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황시인의 시적 서정의 발원이 남쪽나라 완도임을 알 수 있다. “겨우살이는 아침저녁은 보리밥/ 점심은 고구마가 주식/ 안방에 고구마 저장하는 곳은 방의 절반을 차지했다”에서 그 시대를 살아온 우리들에게 많은 공감을 주고 있다. 울목에 수수깡으로 엮은 고구마 통구리가 봄소식이 오기도 전에 바닥을 드러내던 지난한 가난의 시절을 생생하게 떠올리게 한다. 가난 속에서 오직 학업에의 열정과 지평선을 향한 시인의 인내가 돋보인다. 시인은 당당하게 “ 우리 어머니는 박수진/ 고구마처럼 강인한 여자다”라고 선포하고 있다. 어머니의 호미질과 아버지의 돛단배가 9식구의 희망의 등불이었던 유년기의 기억을 더듬고 있는 것이다.
목련꽃 움트는 초봄
산수유는 벌써 노란 웃음을 날리고
새샘중학교 울타리는 개나리가 기지개를 켰다
겨울잠을 깨는 하품이 터져 나오는 오후
오랜 친구 자전거를 타고
천안천 시냇길을 달리면
바람은 상큼하게 불어오고
버들가지도 봄춤을 춘다
성미 급한 태공은 수양버들 물오른 나무 아래
둥지를 틀었다
춘분이 청명절로 건너가는
봄이 따라 나선 꽃 피는 강변
한들거리는 버드나무 춤사위
송아지 엄마 찾듯 봄마실을 나간다
노란 편지가 봄보다 먼저 찾아오면
푸른 청산도 유채꽃 황홀한
그 섬에 가고 싶다
이런 때는 뜬금없이 남쪽으로 튀어
-「남쪽으로 튀어」전문
황시인은 서정시가 뿜어내는 감칠맛 나는 표현들과 공감의 기쁨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감정적 열정에 의해 발아되고 발현되는 사고와 동기들이 하나의 커다란 힘으로 나타나고 있다. “노란 편지가 봄보다 먼저 찾아오면/ 푸른 청산도 유채꽃 황홀한/ 그 섬에 가고 싶다”라는 표현에서 보이듯이 순수의 서정과 타고난 남도 사람의 따뜻함과 감성어린 시어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 바다에 둘려 쌓인 완도의 섬에서 몸에 익숙해진 깊이와 넓이의 가락들이 여러 시편 속에서 보여진다. “흙벽에 걸린 오래된 그리움처럼/ 완도의 초가집은 유년의 향수가 박제된 박물관”, “젊디젊은 어머니는 할머니가 되었지만/ 제 눈에는 마흔 둘의 어머니로 남았습니다”, “길 떠난 동무들이 많은데/ 등 굽은 소나무 몇 남아/ 터를 지킨다”, “배고프던 시절/ 발견한 꿩알을 삶으면 훌륭한 간식”이 되었던 시절의 추억들을 황시인 특유의 기법으로 그려내고 있다.
죽어서 천국 가겠다고
교회에다 바치고
극락왕생 하겠다고 절에서 빌면
하늘나라 갈까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가서 없으면
가보니 아무것도 없으면 낭패다
되돌릴 수도 없는
차라리 어머니한테 잘해서
노모 곁에 천국을 만드는 것이 지름길
천당은 멀리 있는 세상 밖의 유토피아가 아니리라
어머니 발아래 있는 그 곳을 곁에 두고
교회에서 절에서
큰 바위에다 고목에다 빌면
그게 어디 그곳 가는 정거장인가
늦봄
봄비가 살살 내려
세상은 고요하고 살기 좋은
천국이요 극락이었다
-「천국은 어머니 곁에」전문
“어머니 발아래 있는 그 곳을 곁에 두고/ 교회에서 절에서/ 큰 바위에다 고목에다 빌면/ 그게 어디 그곳 가는 정거장인가”, “차라리 어머니한테 잘해서/ 노모 곁에 천국을 만드는 것이 지름길/ 천당은 멀리 있는 세상 밖의 유토피아가 아니리라”라고 솔직하게 말하고 있다. 오해하지 마시라. 교회와 절을 폄하시키는 내용이 아니다. 9남매의 시선을 받았던 어머니의 희생정신과 위대하심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다. “전어가 여문 가을이 오면/ 아버지의 그물은 무거웠다/ 리어카를 끌고 선창에 가면/ 작은 목선을 가득 채웠던 가을전어/ 전어는 살아서 갑판을 뛰어 다니고/ 아버지의 밭고랑 같던 이마의 주름 사이로/ 필터도 없는 궐련 담배 연기가/ 해무보다 짙게 피어올랐다”라는 표현은 중의적 표현의 백미로 보인다. 전어 굽는 연기와 아버지의 궐연 담배연기와 해무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2. 서정의 지평을 열다
황시인은 남쪽 완도와 청산도 등 바다 내음이 깃든 서정의 근본을 지니고 있는 시인이다. 이런 근본을 가진 시인은 정감어린 정서와 예리한 관찰력으로 세상을 관조하기 시작한다. 우주의 섭리이며 찰나처럼 흘러가는 시공간 속에서 바위위에 피어난 채송화 한 송이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생명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공유하고 싶은 것이다.
메마른 바위를 집터 삼아
꽃을 피우고
아침이슬 몇 방울로 목을 축이는
바위채송화
채송화로도 고운데
바위채송화라니
사막 같은 메마른 바위의 건조함도
시원한 이슬 내리면 해갈이 되는 꽃
툭 떨어지는 감로수 한 방울에
마른 목을 축이고
러시아 월드컵을 본다
세상은 가물어도
축구공은 잘도 굴러가는구나
하지 무렵
-「바위 체송화」전문
황인칠 시인의 시는 온 몸으로 살아내는 일상의 정서와 강하게 결합되어 있다. 「바위 체송화」에서 “메마른 바위를 집터 삼아/ 꽃을 피우고/ 아침이슬 몇 방울로 목을 축이는/ 바위채송화”를 결코 혼자있게 만들지 않는다. 어둠과 고요의 고독 속에서 피워낸 한 송이의 채송화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안반데기에 무꽃이 무성하게 피어나면/ 가을이 성큼성큼/ 걸어오는 소리가 보인다”라며 간절하면 가을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고 태연하게 자신의 통찰력을 은근 드러내고 있다.
간월도 가는 길
중국 쪽으로 얕은 바다가
지는 해를 품었다
사람도 죽을 때는 선한 소리를 하고
새도 마지막 울음이 절창이라는데
지는 해는 장엄하다
간월암이 없더라도
석양은 해송 숲에 불을 덩것다
노을이 너무 고와
가슴 속에 비가 내린다
남은 날
월드컵 대회 서너 차례 지나고 나면
이승도 해가 지리라
러시아 카타르 북미
부질없는 생각을 덮고 저녁 숲을 본다
불이 덩것다
지는 해는 이리 고운데
-「솔숲에 불이 덩그면」전문
황인칠 시인의 일상을 보는 시선이 정겹지만 독자들에게는 숙연한 떨림과 깊은 사고를 하도록 유도한다. “사람도 죽을 때는 선한 소리를 하고/ 새도 마지막 울음이 절창이라는데/ 지는 해는 장엄하다”며 복잡 다단한 세계정세는 차치하고라도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할지를 선언하고 있다. 시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솔숲에 불이 덩그면」이란 작품을 통해 흐르는 강물처럼 흐름에 몸을 맡기고 순리에 순응하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칠백이 넘으면 교만할세라
한 뼘 모자란 높이로 우뚝한
천안의 진산
광덕사 호두나무는 원조라 광을 내고
오래된 절집의 고취는 석탑으로
지난 세월을 대변한다
절 아래 주막에서 목을 축이고
오른쪽 산길을 오르면
운초가 잠든 곳
산수국 활짝 핀 오솔길은
오월의 신록을 예찬하는 응원가
가는 발길 잠시 멈추고
부용묘에 시를 바친다
광덕산에 가면
부엉부엉 부용이가 운다
차례주 한 잔 술에 시흥이 돋우면
지척의 뻐꾸기 화답소리도 여름을 부른다
광덕산에 가거든
부용시인에게 안부를 묻자
사랑은 모질게도 질긴 인연이라고
-「광덕산에 갔더니」전문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나 사랑의 상실로 인한 슬픔보다 더 오래 지속되는 무엇이 있다는 발견, 슬픔과 그리움으로 힘들어 하는 시간에도 여전히 시선은 타자에게 고정되어 있다. 필자는 두어 번 황시인과 함께 천안 광덕산 자락에 잠들어 있는 김부용 시인의 묘에 함께 간 기억이 있다. 정성스럽게 준비한 제상을 올리고 황시인 자신도 시인의 길을 가겠으니 시적영감을 공유하고 싶다고 고백하는 모습을 지켜본 적이 있다. “가는 발길 잠시 멈추고/ 부용묘에 시를 바친다/ 광덕산에 가면/ 부엉부엉 부용이가 운다/ 차례주 한 잔 술에 시흥이 돋우면/ 지척의 뻐꾸기 화답소리도 여름을 부른다”(「광덕산에 갔더니」)라고 부엉이의 울음소리와 김부용 시인의 이미지를 연합시키고 있다.
황시인은 현란한 감각적 수사를 가능한 배제한 맛깔스런 친근한 표현으로 일상을 관찰하고 있다. “사백년 묵은 느티나무 불침번이/ 강을 지키는 두물머리/ 벌겋게 물들어가는 해질 무렵/ 늙은 항구에서 녹슬어가는 폐선처럼/ 배 한 척 우두커니 곁을 지킨다”(「두물머리에 노을이 지면」), “봄은 잠시 얼굴만 보이더니/ 바이칼로 숨어버리고/ 삼복은 멀기만 한데/ 여름은 총알처럼 찾아왔다”(「양수리」), “파란 하늘 쳐다보며/ 옹기장수 할배의 이 빠진 웃음/ 도원리 영감처럼 나이 든 지게도 따라 웃는 밤”(「할아버지 지게」), “망둥이 갯벌에서 뛰듯/ 촐랑대는 송아지가 눈에 밟혀도/ 안반데기 쟁기질 새참시간은/ 소꼬리보다 짧다”(「쟁기질 새참」), “세월의 두께를 용케도 견뎌낸 너와집/ 키 낮은 돌담이/ 오래된 감나무와 어우러져/ 아라리를 부르면/ 깊은 산 속 늑대도 합창을 할 것 같은/ 고가의 초여름”(「신리 너와집」)등 수많은 정겨운 언어의 선택으로 독자들에게 다가서고 있다.
3. 서정의 재발견과 새로운 시작
정지된 나무는 새들을 받아들이지만 새들은 나무를 선택할 수 있다. 황시인은 삶의 현장을 중국 대륙으로 옮겨간다. 인간은 적응 능력이 뛰어나지만 가족의 생계를 위한 가장의 피눈물나는 객지 생활은 쉽지만은 않다. 새로운 언어를 습득해야하고 환경과 직장 패턴의 변화에 적응하는 것은 눈물겹다. “질 줄 모르고/ 떨어질 줄 모르는/ 현직에 목숨을 거는 노년의 비애”(「장강후랑추전랑」)라는 표현에서 현실을 직시한 황시인의 가족에 대한 책임의식을 느낄 수 있다.
민다나오의 어부들은 늘 웃는다
슬픔 금지
우울하면 바다에서는 사고를 친다
참치잡이 낚시
가는 줄로 백 킬로가 넘는 고기를 낚는 중노동
사십 도가 넘는 바다에서
한 달이 넘도록 낚싯줄을 당겨도
행운은 드물다
평생 가난하게 살 것 같아요
어린 어부의 얼굴은 피부색만큼이나 어둡다
미래가 없는 날들이지만
그래도 슬픔 금지
민다나오는 필리핀의 제주도
참치라도 풍어가 들면
어부의 얼굴에 꽃이 핀다
아 어쩜 그렇게 무한긍정으로 살 수 있을까
늘 웃고 살 수야 없지만
험한 세상
그럴수록 슬픔 금지
희망의 참치를 찾아서
태평양의 무지개를 낚는다
-「슬픔 금지」전문
눈물은 힘이 있다. 어느 민족 누구에게나 짊어지고 가야할 삶의 무게를 가지고 있다. 민다나오섬의 주민들도 생계를 위해 고기를 잡아야 한다. “평생 가난하게 살 것 같아요/ 어린 어부의 얼굴은 피부색만큼이나 어둡다/ 미래가 없는 날들이지만/ 그래도 슬픔 금지”, “아 어쩜 그렇게 무한긍정으로 살 수 있을까/ 늘 웃고 살 수야 없지만 / 험한 세상/ 그럴수록 슬픔 금지”(「슬픔금지」)만이 그들의 운명인 것이다. 마음놓고 울 수도 없는 허기진 그들이지만 결코 웃음을 잃지 않는다. 가진자들 만이 행복한 것은 아니다. 적게 가져도 사십 도가 넘는 바다에서 한 달이 넘도록 낚싯줄을 당겨도 고기를 잡지 못하지만 어부들의 얼굴에는 희망의 미소가 깃들어 있다. 황시인은 서서히 중국 대륙에서의 삶에 적응해 나간다. “배롱나무꽃 붉어지면 피서 철/ 소주에서 소통대교 건너면 남통/ 장강이 굽이쳐 흐르고/ 강수욕 즐기는 인파로 강변은 북적인다/ 수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다들 발만 담근다/ 강물이 막걸리보다 탁하다” (「목화이불」), “태호에서 다리를 세 개 건너면 호수 가운데/ 큰 섬이 다가온다/ 토종말을 방목하고 귀하지만 무논도 있다/ 석회동굴이 있는 매화동산에 가면/ 왜구를 물리친 명나라 장수 무덤 위로 산책길을 낸 / 중국의 무심함/ 쓰러진 비석을 읽고 알았다”(「연꽃에 반해서」), “쑤저우 양청호는 거대하다/ 큰 호수가 중국 명품 1번지/ 따자새의 원산지다/ 가을이 깊어가면 민물털게도 살이 오르고/ 미식가들은 그 맛에 취한다/ 백주 한 잔 곁들이는 깊은 맛”(「따자새의 추억」)을 느끼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했음을 알 수 있다.
얼마나 멀고 먼지 그리운 서울은
유년시절 육지를 그리워하는 노래를 여객선의 확성기로
듣고 또 들었다
바다가 육지라면
지구는 물도 없는 불모의 행성이겠지
섬아이는 그런 몽상을 키웠다
섬을 떠난 출항은 거침이 없었다
대도시를 지나 중원대륙으로 날아갔다
대륙에는 꿈을 좇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았다
여름휴가로 만리장성을 갔다
모국의 대학생들이 단체로 왔다
반가운 마음에 중국을 소개하는 열변을 토했다
학생들의 반응이 걸작이었다
중국 사람이 한국말을 잘하시네요
이럴 수가
중국살이 몇 년에 외양이 한족하고 다름없었나 보다
머리 모양부터 옷 음식까지 중국으로 범벅이 되었다
육지의 꿈은 대륙에서 영글었다
불혹을 지났고 지천명도 하류에 이르렀다
이순의 바다가 보이자
내가 비로소 청해진 출향인임을 새삼 깨닫는다
장보고의 거친 꿈이 잠든 청해진
완도 동백의 붉은 정열이 상왕봉을 타고 넘는다
-「청해진의 꿈」전문
황시인은 수많은 삶의 현장들을 지나쳐오면서 생활인의 무게감을 겪고난 뒤에 문득 뒤돌아 본 자신의 흔적들을 담담하게 풀어낸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회귀본능이 있다. 또 다른 삶의 터전인 고향을 생각하고 새로운 삶에 대한 긍정의 자세를 다짐해 보는 것이다. “흑룡강성 목단강이 고향이라는/ 김기사는 너무도 부지런하다/ 구내식당 연변댁은 늘 웃는 얼굴로 일한다/ 그들의 근면과 성실함에 고개를 숙인다/ 타국에서 오래 살아도 우리말을 쓰는/ 재중교포들을 보며/ 조선족이라는 하대를 버린다”(「적선지가필유여경」), “개척자로 살았던 럭비공 같은 인생/ 그런 삼촌을 닮은 조카의 피도 뜨겁구나/ 기대가 컸을 동생의 마음도 딸이 떠나간 자리만큼/ 흔들렸으리라/ 그래도 태산처럼 제 자리를 지키는 이들이 있어/ 우리들의 모험도 가능했다/ 중국으로/ 캐나다의 변방으로 떠날 수 있는 용기”(「단비」)라는 시인의 고백은 중국에서의 삶의 영향력이 다시금 돌아온 고국에서의 삶의 현장에 그대로 표출되고 있다.
왜 시인의 삶에 한 순간의 여유로운 공간이 없었겠는가. “사랑은 망각의 장강을 가로질러/ 어느 새 소통대교를 넘어 남통 해문 삼각주 유채밭을 달렸다/ 빗속의 여인/ 그녀는 장강이 낳은 아름다운 숙녀였다/ 겨울에도 비가 내리는 강남땅/ 상유천당하유소항의 소주연가/ 잊지 못할 빗속의 여인/ 역시 하늘엔 천당/ 땅에서는 소주 항주가 최고다”(「빗속의 여인」), “비의 신이 오는 저녁/ 어진 벗과 대작하는/ 음봉막걸리 한 사발에/ 감자전은 커다란 축복이다”(「비의신」), “보라색도 고운데/ 백자보다 더 하얀 도라지/ 더불어 꽃을 피우는 여름 한나절/ 더위 먹은 육신은 터벅터벅/ 절고개를 넘다 둘레길 주막에서/ 막걸리 한 사발에 목을 축인다”(「도라지」)라는 부분에서 황시인은 인생의 중간을 통과한 삶의 여유가 발견된다. 항상 어진벗이라고 필자를 높여주는 황시인과의 문우로서의 동행은 일상의 큰 기쁨으로 다가온다. 이제 어린시절 지평선을 꿈꾸었던 시인은 고향을 생각한다. “육지의 꿈은 대륙에서 영글었다/ 불혹을 지났고 지천명도 하류에 이르렀다/ 이순의 바다가 보이자/ 내가 비로소 청해진 출향인임을 새삼 깨닫는다/ 장보고의 거친 꿈이 잠든 청해진/ 완도 동백의 붉은 정열이 상왕봉을 타고 넘는다”(「청해진의 꿈」).
표제작인 솔숲에 불이 덩그면을 통해 우리들의 삶이 가시밭길만이 아닌 행복으로 초대되는 길이 많음을 간접 경험하게 된다. 자연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순응하는 삶 또한 행복으로 초대되는 길임을 배우게 된다. 詩作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시작은 사랑을 기록하는 것이고 에로스에 가까운 생명과 창조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과정이다. 안정된 구성과 신선하고도 정제된 언어구사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황인칠 시인은 상실의 슬픔과 인간관계 속에서 터득한 수많은 경험을 묵묵히 그려내고 있다.
시집 안에서 시편들이 일정하게 시적수준을 유지하며 각각의 시편들이 엮여져 일관된 시세계를 보여줄 때 독자들은 삶에 대한 간접체험의 순간들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탄탄한 상상력과 참신한 이미지의 첨단 서정과 황홀하고 짜릿한 삶의 모습들을 진정성 있게 담아야 한다. 물론 황인칠 시인의 시편들에는 어찌 부족함이 없겠는가. 첫 시집 출간을 계기로 더욱 치열하게 삶을 살아내고 독자들에게 책임 있는 시인으로 우뚝 서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