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섬/ 박성민 시집 -무이재 시선집2
섬과 사막 사이의 길과 꿈을 노래하다
나호열 ( 시인 ․ 경희대학교 사회교육원 교수)
1.
박성민의 시집 『꿈꾸는 섬』은 우리가 잊고 있었던 문제 하나를 상기시킨다. 이 시집에서 눈 여겨 보아야 할 점은 디아스포라diaspora가 함의하고 있는 민족 정서의 표출과 더불어 그 정서의 동질성이 어떻게 인류에 대한 보편적 이해와 화해로 이행 될 수 있을 것인가를 탐색해 보는 일이 될 것이다.
돌이켜 보면 오래 전부터 한민족문학, 디아스포라 diaspora 문학에 대한 관심과 논의는 국내에서 꾸준히 있어 왔다. 천만 명에 육박하는 해외 동포들 중에서 우리 말로 글을 쓰는 시인 작가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자연스럽고 자랑스런 일인가! 이에 국내의 몇몇 문예지에서 해외동포 문학에 대한 관심을 높이면서 문인들을 발굴하고 조명하는 작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음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그 한 예로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주관으로, 올해 3회째가 되는 세계한글작가대회가 열리면서 국내의 문인들과 세계 각지에서 찾아온 동포문인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한국문학의 오늘과 내일을 조망하면서 이격된 시공간의 교집합을 찾는 일도 그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단지 한글로 창작한다는 이유 하나로 국내의 문학과 해외동포문학을 민족적 정서 하나로 묶을 수 있다는 전망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전자통신기기의 발전으로 생활의 양식을 리얼타임으로 공유할 수 있다 하더라도 환경의 차이에서 오는 문화의 다양성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는 점에서 국내문학과 해외 동포문학간의 간극은 존재하기 마련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국내문학과 해외동포 문학의 교집합은 존재론적 탐구의 영역에서 보다 활성화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환경적 여건 아래서도 삶의 이유와 존재에 대한 질문은 문학의 필요충분조건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집 『꿈꾸는 섬』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 어떤 사유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을까?
2.
박성민은 캐나다 이민의 일 세대에 해당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캐나다로 이주한 그가 당면한 현실은 간난 艱難 - 정신적 측면에서 - 그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에릭슨Erikson의 인간발달이론에 의하면 청소년기에는 자아정체성 ego -identity이 확립되어야 하고 이것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하면 역할혼란 role confusion이 온다고 한다. 이어서 청년기에는 자신의 정체성과 타인의 정체성을 연결하고 조화를 이루는 노력을 하게 된다고 한다. 이를 비추어볼 때 박성민의 전 생애를 관통하는 인생관이나 세계관은 이질적 문화와의 조우로부터 비롯된 소외, 상실감을 상쇄하는 관용과 타협의 정신을 일구는 가운데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날개보다 꿈으로 날아왔기에/ 날아온 사실 꿈처럼 잊어버렸다’(「새」)는 풍요로움을 염원했던 이민의 꿈은 좌절의 형국을 맞이하게 되고 아래와 같은 술회로 제시되고 있다.
바다 건너오면 넓은 땅에서
하늘을 찌르며 자라는 나무들처럼
꿈과 약속이 다투며 자라고
구름을 잡으려고 손을 뻗으면
구름이 손 안으로 들어오는 줄 알았다.
키 큰 이웃들이 손을 잡아주어
키가 저절로 자랄 줄 알았다.
하늘은 더 멀어지고 그들 옆에서
키가 더욱 작아지는 걸 몰랐다.
키 큰 사람 있어 키 작은 사람 있다.
- 「키」 부분
그러나 박성민의 시는 이러한 좌절이 일으키는 절망에 머무르지 않는다. ‘비가 옵니다./ 또 울어야 하지만 울지 않으렵니다.’(「청개구리」)에서 보이는 바와 같은 강한 의지가 시인의 삶의 또 다른 추동력임을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문학을 비롯한 예술행위는 상상력의 소산, 즉 허구이다. 그러나 그 상상력으로부터 빚어진 허구의 세계의 배경에는 현실의 체험이 녹아들 수밖에 없으므로 우리는 이와 같이 작품을 통해 시인(작가)의 성향이나 현실 감각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박성민의 시집 『꿈꾸는 섬』은 앞서 말한 관용의 정신으로 타자와의 관계를 이어가는 전 생애에 걸친 사유의 흔적이며 절실한 고백이라고 볼 수 있겠다.
한 마디로 박성민에게 있어서 이 세계의 두 축은 ‘섬’과 ‘사막’이다. 박성민에게 있어서 ‘섬’은 그가 당도한 이국(캐나다)이면서 고독으로 추상되는 인간의 필연적 존재양식이기도 하다. ‘섬’이 지니고 있는 이 양면성은 등가 等價를 이루면서도 ‘꿈을 꾸는’ 장소로 각인된다. 이런 점에서 시인의 생활 공간은 ‘ 때묻은 손에서 떨어지는 붉은 피/ 사소한 일에 얼굴 붉게 달아오르는데 / 풍금 치는 선생님의 하얀 손이 보이는’( 「어린 시절 풍금소리」) 고국과 ‘ 긴 겨울을 두고 먼 길을 달려왔어도 / 후회하지 않는다’( 「꽃샘추위」)는 이국의 정서를 하나로 통제하려는 의식으로 전화 轉化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고국/ 이국의 정서를 하나로 통제할 수 있는 까닭은 시인이 깨달은 이 세상이 거대한 하나의 사막이며 우리는 그 사막을 건너가는 낙타라는 인식에 있다. ‘사막’이 의미하는 바 이 세계는 물신 物神과 이기적 개인주의, 생존을 위한 무한 경쟁이 횡행하는 곳이다. ‘섬’일 수밖에 없는 개체가 광대한 ‘사막’으로 표징되는 현대사회의 단면을 가로질러 세계화의 미명 아래 전 지구적 양식 樣式으로 고착된 삶을 이어나감에 있어 연대 連帶 내지는 이질적인 종족 간의 동질성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당위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꿈꾸는 섬』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3.
호수가 바다 같은
대륙에 살면서
섬에 살고 있다.
섬에 살면서
섬에 살고 있다.
밀려오는 파도에
하나씩 둘씩
가라앉는 섬
- 「섬」 전문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박성민 시인에게 있어서의 섬은 캐나다라는 이국인 동시에 모든 인간이 서로가 이격된, 고독한 존재라는 인식과 일치한다. 이러한 ‘섬’이 의미하는 양면성은 ‘하나씩 둘씩/ 가라앉’는 몰락을 예고하지만 그 몰락은 몰락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오래 전 물 밑으로 가라앉아
나를 잊고 침묵으로 누웠다가
꿈을 꾸어, 네가 있어
다시 물 위로 솟아 섬이 된다.
- 「꿈꾸는 섬」마지막 연
시인은 자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금 내가 이 바다에서 가라앉지 않는 이유는 / 꿈을 꾸기에, 노래를 부르기 때문이 아닐까?’
비록 자신의 의지에 따른 이민이 아니었을지라도, 적빈 赤貧을 떨쳐내고자 험한 이주를 결행한 선대의 의지에 따른 것이었을지라도 그가 체득한 자아의 정체성은 다음과 같은 시에서 명확하게 구현되어 있다.
평생을 험한 파도와 싸우며
방황해 본 사람은 안다.
사방에 보이는 것 바다뿐이지만
어딘 가에 육지가 있다.
새들이 앞장 서 가고 있다.
- 「새들이 앞장 서」전문
빈번하게 박성민의 시에 드러나는 ‘가라앉고’, ‘솟구치고’, ‘앞장서는’ 움직임은 조금 깊이 생각해보면 뿌리내림으로 형언할 수 있는 정착의 욕구로부터 발화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꿈꾸는 섬』1 부에 집중되어 있는 여러 식물들에 대한 관심은 시인이 염원하는 세계가 ‘추울 때 옷을 벗는’( 「겨울나무」) 결연함과 ‘가격을 매기면 소리를 삼키고 / 얼굴 감추며 시드는’( 「나팔꽃」)세속적 가치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정신, ‘구석자리에 있어 보이지 않고/한 뼘 안되 꽃병에 꽂을 수 없’지만 ‘쏟아지는 햇빛 아래 /눈이 부시게 빛나던 꽃잎 / 뜨겁게 타오’를 줄 아는 (「채송화) 열정을, ‘뿌리도 없이 떠돌 때 우린들 알았으랴/ 가슴 속 싹트는 햇살’(「민들레」)과 같은 인내를 가슴에 새길 줄 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와 같이 박성민의 ‘섬’은 동적인 속성과 식물적 속성이 하나의 정적인 뿌리로 이어져 있음을 증명하는 삶의 한 기제 基劑이기도 한 것이다.
4.
어디서나 낯 선 곳으로의 이주 移住는 힘겹다. 그러한 까닭에 떠나온 곳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은 곧잘 디아스포라 문학의 한 특징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특징이 일반화되어버릴 때 감상 感傷의 문학, 회한의 읊조림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어느 사회나 그 사회가 암묵적으로 압박하는 문화가 존재하고 그 문화에 동화될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문제는 문학 일반이 다룰 수 있는 영역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다수majority/ 소수 minority의 개념이 불러오는 정착과 소외의 경계에서 경제적 풍요나 세속적 성공의 여부는 디아스포라 문학의 본질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이 글의 서두에서 밝힌 바와 같이 시(문학)의 지향점은 삶의 이유와 존재에 대한 탐문에 있다. ‘섬’으로 상징되는 고독과 소외가 시인 박성민의 존재의식이라면 ‘사막’은 ‘섬’과 ‘섬’이 확장된 타자와 연계된 응전의 장소이다. 이 사막의 전면 풍경은 자본주의가 이룩한 소비문화의 쓸쓸함이며 그 후면의 풍경은 무한경쟁에 시달리며 이기적으로 타락하고 소외되는 군상들의 고해 告解이다. 다소 길기는 하지만 아래의 시는 우리가 지니고 있던 통념을 전복시킨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대로 인용하기로 한다.
세상은 대나무 숲이다.
하늘 찌르며 서있는 빌딩처럼
서로 팔을 뻗어도 잡을 수 없고
주어진 자리에서 고만한 키로 자라는,
다급히 뛰어 들어온 사람이
밖에서 하지 못한 말 토해내면
땅속에 누워 잠자던 바람이 깨어나면
소리와 소리가 부닥쳐 소리 내고
그 소리 삼키며 대나무는 자란다.
입 다물고 푸른 하늘 쳐다보지만
구름도 멈추지 않고 흐르는 숲 속
굳게 다문 잎 날로 푸르러지고,
이 땅은 고요하고 사람들 침묵한다.
대나무 숲이 침묵하는 이유 모른다.
요즘 세상 그 누구도 남의 일에
자기 일에도 분노하지 않는다.
자리 찾은 사람들 자리를 지키려
침묵하고 눈치 보아야 한다.
바람 불어도 잎 부닥치는 소리 없다.
다급하게 도망쳐온 사람이 땅을 파고
피를 토하며 외쳐도 잎새 흔들리는 소리
두려운 것은 두려움 자체라 해도
누군가 나무를 풀 베듯 베어버리거나
숲 채로 불사를지 모른다.
사람은 작은 일에 자신을 속이듯
가슴 속 몇 마디 말 언제든지 삼킬 수 있다.
숲 속 침묵 위에 그림자처럼 따라온 평화
나뭇잎을 비집고 들어온 햇살도
가지 끝에 매달려 졸고있다.
- 「대나무 숲」 전문
이른바 사군자 四君子중의 하나인 대나무가 「대나무 숲」에서는 절개와 굳은 의지의 표상이 아닌 힘든 삶 앞에 그저 침묵할 뿐인 절망의 상징으로 환치되어 있다. 말하자면 우리 모두는 허장성세를 누리며 스스로 대나무처럼 꼿꼿한 것 같지만 어느 곳이나 곤고한 삶은 ‘ 우상을 섬기기에 잘난 백성들/ 영웅을 기다리다 지쳐’ 동상을 세우고, ‘모든 생각과 감정은 반사적/ 무슨 말을 보고 했는지/만남과 헤어짐도 순간/ 감정도 손끝으로 만지고/사랑도 눈으로 한다./ 모니터에 쓰면서 지운다.’ (「종이와 모니터」)는 일회적인 삶에 길들여져 가고 있는 것이다. ‘거울은 나를 보는 건데/ 나 아닌 남을 봄’(「거울」)으로서 ‘나’는 ‘우리’로부터 멀어져 가고 ‘사람도 얼굴이 필요 없다./ 목 잘린 마네킹은 유리관에 갇혀 / 지키는 곳에 피부 빛의 차이도 없고/ 살 사람과 사지 못할 사람만 차별’하는「마네킹」이나 ‘나는 웃을 줄 모르는 아이였다./ 세상에 나올 때 울며 나왔고/집에서 웃는 것 보지 못했으므로 /웃음을 배우려 광대를 따라다닌’「광대」가 되어 가는 자신을 망각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믿을 건 약장수의 말뿐인 세상’ (「허공에 꽃을 피우며」)에서 그러나 시인은 오랜 고투 끝에 끝내 다음과 같은 절구 絶句를 얻는다.
늘 속고 속이며 살아가지만
속은 것은 헛된 약속이 아니라
아무 것도 믿지 못하는 내 자신이다.
- 「 사막건너기」부분
세상이 나를 속인 것이 아니라 진실로 속고 있는 것이 아무 것도 믿지 못하는 자신임을 깨달을 때 세상은 홀연히 넓어지고 모든 경계는 무너진다. 왜 시인의 섬이 꿈꾸는 섬인지, 사막을 건너는 힘겨움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시「새벽 지하철」을 통해 넌지시 건네받을 때 우리는 비로소 시인이 꿈꾸는 사랑의 열매가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이다 . 수만 리 바다 건너, 대륙을 지나야 하는 서울과 토론토의 삶의 풍경은 결코 다르지 않다!
아침 출근 시간보다 이른 시간
함께 길을 떠나는 사람 아름답다.
눈이 마주쳐도 잠시 웃다 마는
웃음 짓다 고개 돌려 창밖을 보지만
모두 먼 곳에서 온 사람들
한 배를 타지 않고
한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며
약속의 땅으로 가고 있다.
터번 머리에 두르고
경비원복 입은 인도 할아버지
이 넓은 대륙을 지키고 있다.
창문에 머리 기대고 부족한
수면을 채우는 동유럽 노동자
이 땅의 모든 힘든 일을 하고 있다.
하얀 이빨을 허공에 드러내며
꿈꾸듯 웃고 있는 쟈마이카 흑인
더 이상 노예가 아니다.
이 땅에 그 흔한 자동차도 없이
지하철을 타고 어디론가 간다.
각자의 일터로 간다.
터널의 끝은 보이지 않지만,
하루가 피곤해도 가야 할 곳이 있어
꿈 꾸는 날이 있어 아름답다.
지구촌 각 구석에서 저마다의 언어와
저마다의 꿈을 품고 흘러와
낯선 대륙에서 땀을 흘린다.
모든 미움을 사랑으로 받아들여도
빛깔 달라 미움 받지만
미움도 색깔 바꾸면 사랑이 된다.
늦게 와서 문밖에 서있지만
몸으로 하루를 사는 그들
말로 사는 사람보다 먼저 일어나
어두운 터널을 달리는 지하철을 탄다.
새벽지하철은 땅 밑을 달리지만
힘찬 바퀴 구르는 소리로 어둠을 깨우며
이 대륙의 하루를 연다.
새벽지하철 약속의 땅으로 달려간다.
- 「새벽 지하철」 전문
토론토 Toronto는 토착 원주민의 말로 ‘ 물속에 나무가 서 있는 곳’( 이로쿼이 족Iroquois), ‘빠른 물길이 지나가는 사이의 좁은 땅’( 모호크 족Mohawks)으로 6,70년대에 유럽인들과 동양인들이 대거 이주하면서 토론토는 명실상부한 ‘만남의 땅’이 되었다. 이러한 열린 다문화의 토양 아래서 박성민 시인이 꿈꾸는 ‘섬’은 가라앉지 않고 다시 솟구칠 수 있는 것이리라.
이 땅에 왜 이렇게 호수가 많은가?
떠나온 사람들 남몰래 흘린 눈물인가?
따로 갈 곳이 없는 사람
혼자 걷다 보면 호수 앞에 서있다.
수평선 너머로 보일 것 같은
고향바다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물은 혼자서 흐르지 못해
누가 끌어당기고 뒤에서 밀어
함께 어깨를 붙이고 앞으로 흐른다.
이제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호수에서
서로가 서로를 놓아주지만
헤어지지 못하고 함께 서성인다
호수에 물이 어떻게 쌓이는지
어디서 왔는지 묻지 않고
어디로 가는지 물어야 한다.
깨어진 꿈은 호수 바닥에 잠들고
흘러온 물 돌아갈 생각하지 않는다.
언어가 다르고 피부 빛이 다르다고
물은 물을 밀어내지 않고
아무도 호수 앞에서 울지 않는다고
흘러온 물 돌아갈 생각하지 않는다.
모르는 사람끼리 만나 한 몸이 되었는지
호수는 흘러온 모든 물을 품어
호수가 된다.
- 「호수 」전문
‘어디서 왔는지 묻지 않고, 어디로 가는 지 물어야 한다’는 시인의 언명은 이제 막 다문화의 세계로 진입해 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참으로 뜨겁고 간절한 외침이 아닐 수 없다.
5.
『꿈꾸는 섬』은 박성민 시인의 전 생애에 대한 회고이며 깨달음의 증언이다. 삶에 대한 회의 懷疑와 번민, 반목과 화해 사이에 놓인 사막을 치열하게 지나오면서 남겨진 발자국을 되새겨보는 한 편의 드라마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인지 시집『꿈꾸는 섬』은 번득이는 아포리즘과 직설적 화법이 두드러진다. 모국어가 지닌 음율과 비유의 아름다움을 펼쳐 보이기에는 시인의 삶이 녹록치 않았다는 사실을 그의 시편들은 증명해 보이고 있다. 이제 박성민 시인도 이순 耳順을 넘어가고 있다. 관조의 눈이 더 밝아진다면 이미지에 충실한 시편이 무궁하게 생산될 것이라 믿는다. 아직도 시인에게는 변함없는 동심 童心의 세계가 자리 잡고 있음을 잊지 말자. 「눈 천사 (The Snow Angel)」처럼 맑은 동심과 어우러진 평화와 안식의 시가 우리를 기쁘게 해줄 것을 굳게 믿는다.
아이들 팔 벌리고 누웠던 자리
아이들 노는 모습 부러워하던
천사가 내려와 눕는다.
하얀 날개 위에 쏟아지는 햇살
눈부신 날개가 퍼득거린다.
누웠다간 천사를 찾아
아이들 꿈처럼 날아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