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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최성희 시인의 시집 『양구의 봄』은 고통 속에서도 희망에 대한 예감을 포기하지 않는 삶의 자세와 삶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깃든 시편들을 통해, 삶의 비탈길에서 움튼 작고 단단한 생의 의지를 시적으로 포착해 낸다. 특히 강원도의 지명들이 자주 언급되며 시적 배경과 정서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 시집은 지역성과 서정성 그리고 인간 존재의 상처와 회복의 언어가 절묘하게 교직된 작품집이라 할 수 있다.
표제작인 「양구의 봄」이 그러하듯, 이 시집에서 ‘봄’은 마냥 따스하거나 풍요로운 계절이 아니다. 봄은 “소문 퍼트리는 개구리들의 떼창” 속에서 “속울음 슬쩍 끼워 넣는” 감정을 유발하고, “솜이불 덮고 자는” 양구의 4월은 여전히 냉랭하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은 희망이라기보다, 어떤 고통을 견뎌낸 자에게만 허락되는 보상처럼 다가온다. 또한, 「환상통」에서 “봄이 온다는 건 / 시린 만큼의 몸살이 도지는 일”이라는 구절은, 봄이라는 계절 자체가 오히려 과거의 고통을 되살리는 열쇠가 됨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환상통’은 단지 상실의 아픔이 아닌, “무지개를 다 우려 마셔도” 그 빛깔을 품으려는 간절한 희망의 은유이기도 하다. 이렇듯 이 시집의 시들에는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상상하고 예감하는 시적 태도가 두드러진다.
또한, 이 시집의 많은 시들은 강원도의 지명들을 배경으로, 삶의 오작동 속에서 피어나는 봄의 가능성을 은유적으로 그리고 있으며, 흔들리는 삶의 한가운데서도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는다. 「길이 없는 길 위에서」에서는 개미를 따라 흔들리며 오르는 인생의 언덕길을 성찰하며, “산다는 건 흔들림”이라는 말로 요동치는 삶의 본질을 드러낸다. 「풍기역」과 「속초 밤바다」는 고향과 가족 그리고 과거의 아름다운 시간이 새겨진 장소들에 대한 애틋한 기억을 담고 있다. 특히 풍기역에서 어머니의 환영을 떠올리는 장면은 유년과 노년, 꿈과 현실이 교차하는 감동의 순간이다. 시인은 이러한 기억을 통해 시간의 잔여물과 존재의 중심을 되새긴다. 「말과 말의 고리」에서는 언어의 폭력성과 삶의 불확실성을 풍자하면서도, 결국에는 노아의 방주와 비둘기의 귀환을 소망하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최성희 시인의 『양구의 봄』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세계가 “오작동”하고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 어긋남 속에서 피어나는 봄의 가능성을 응시하는 시집이다. 이방인처럼 떠돌고, 첫사랑의 환상통에 시달리며, 과거를 잊지 못한 채 풍기역에 머물기도 하지만, 시인은 결국 “하늘궁전” 같은 속초 밤바다에서 자신의 별을 찾고, 아직 피지 않은 산수유의 꽃에서 다시 한번 시를 품는다.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상상하고 예감하며, 흔들리는 길 위에서도 여전히 따뜻한 시선을 견지하는 이 시집은, 강원도의 지명을 따라 산천을 걸으며, 마침내 우리의 삶과 맞닿는다. 『양구의 봄』은 한 시인이 어떻게 고통을 통과해 희망의 언어를 길어 올리는지를 보여주는 귀한 시적 기록이다.
시인의 말
퍼즐 한 조각 같은
자음과 모음의 알갱이들
해리포터의 마법 빗자루처럼
그 언어의 알갱이들을 가로세로 연결하다 보면
기억 한 페이지에서 세월이 쏟아집니다
천 번을 잘리고도 살아나는 기억의 조각들
다인칭으로 천기를 누설하는 언어와 언어들
자음과 모음의 행간을
저울추처럼 달아 내리던 퇴고와 퇴고
밀려난 언어들이 밤새워
퍼즐을 맞춥니다
달빛 홀로 깊습니다
2025년 6월
양구 구암리 고을에서 최성희
시집 속으로
주인을 버리고 떠난 목마와 숙녀처럼한계령을 넘어온 듯 창문을 기웃거리는데
-「박인환 문학관에서」 부분
봄이 온다는 건시린 만큼의 몸살이 도지는 일이다녹는 듯 하다가도 얼어붙는 얼음의 조각들-「환상통」 부분
별가루처럼 떨어진 빵 부스러기그 한 조각을 보물인 듯 입에 물고언덕을 넘어가는 저 숨 가쁜 몸짓
-「길이 없는 길 위에서」 부분
바깥과 안의 경계에서 길을 잃은 귀고막저 하늘 은하수에 빠졌는가해독되지 못한 모국어 한 음절이우주를 빙빙 돌고 있다
-「모국어 한 음절」 부분
줄자처럼 꽁무니가 얼굴에 닿기까지수천 번 접고 폈을 그의 몸짓자벌레가 재고 오른 달의 한 뼘 길이다-「가을 한 모서리를 돌아가는 자벌레처럼」 부분
아버지도 소도 고갯마루에 버티고 서서등 뒤로 멀어지는 초가지붕을 꿈속인 듯 내려다보며턱 끝에 찬 한숨을 땀방울로 피워 올렸다-「소의 눈물 」 부분
양구로 오세요달빛도 쉬어가는 월명리에서꿈같은 당신들의 첫사랑을 캐 보세요-「양구, 월명리를 아시나요」 부분 목동 칼디는 얼마나 많은 별을 건너서나에게로 온 걸까은하가 파도치듯 출렁인다염소 꼬리가 수평선으로 구부러진다-「칼디와 염소와 찻잔」 부분
창문 밖 하늘에두 다리를 가진 구름들이 달리고 있다
-「뼈를 빼다」 부분
내가 어둠에게 둥지를 허락한 날부터내 영혼 어디에도 없는 착한 늑대
-「두 마리 늑대」 부분
고양이는 왜 자꾸 배꼽을 물어 나를까날개도 없는 별들이 왜 날아다니는 거지파랑새들은 또 하늘을 뒤지나별들이 쏟아진다
-「별들의 배꼽」 부분
그는 몇 개의 봉우리를 건너서 여기까지 왔을까두 갈래로 떨어지는 폭포의 음계 이룰 수 없는 한 문장이비파 위 수금 소리로 펄럭이고 있다
-「물소리」 부분
물의 분기점에 비 기둥를 세운 듯한 목숨이 간다중독이란 뭘까
-「첨탑에 걸린 낮달 같은 중독」 부분
바다 한가운데를 질러오는 파도 소리 문어발들이 기억 속에 걸려 꿈틀거린다
속초는 우리에게 영원한 밀물이다
-「속초를 새기다」 부분
고장 난 자전거에 졸고 있는 햇살 한줄기
페달에 두 발 얹은 6월의 태양
-「졸고 있는 6월 햇살」 부분
양구의 사월은 솜이불 덮고 잔다여우 꼬리처럼 지나가는 양구의 봄-「양구의 봄」 부분
차례
1부 한계령을 넘어온 듯 창문을 기웃거리는데
졸고 있는 6월 햇살/ 박인환 문학관에서/ 환상통/ 길이 없는 길 위에서/
무섬마을 외나무다리/ 아킬레스 일기예보/ 상무룡 출렁다리에서/ 파랑새와 달/
모국어 한 음절/ 가을 한 모서리를 돌아가는 자벌레처럼/ 소의 눈물/ 죽계구곡/
붕어빵을 굽는 한 사람/ 사과 흘림체/ 양구, 월명리를 아시나요/ 백지
2부 지금은 부재중
속초를 새기다/ 칼디와 염소와 찻잔/ 말과 말의 고리/ 의문의 꼬리/ 옛날 같으면/
뼈를 빼다/ 나무를 자르다/ 물방울 여행/ 아버지 기침소리/ 콩깍지/ 두 마리 늑대/
서천/ 지금은 부재중/ 처서/ 별들의 배꼽/ 풍기역
3부 물소리
가까이 또는 멀리/ 물소리/ 첨탑에 걸린 낮달 같은 중독/ 깜박했습니다/
바람의 독경/ 미역국 서사/ 수술/ 졸음쉼터/ 그 목소리/ 밤바다/ 풀무와 화덕/
속초 밤바다/ 연못 속에 내려온 하늘/ 빈집 한 채/ 조약돌/ 그늘로 기우는 노을
4부 당신의 첫사랑을 캐 보세요
해물파전/ 양구의 봄/ 키가 자라듯 말이 자란다/ 대게 수족관/ 하늘 정거장/
그는 거기 없었다/ 삼선짜장/ 빈 장터/ 엄마의 말처럼 내 아이들에게/ 떠난 후/
산사 커피숍/ 종이비행기/ 산수유/ 밥 주세요 / 그런 본능
해설 _ 자연의 숨소리로 시를 끓여 내는 시 세계
이영춘(시인)
해설 중에서

최성희의 시는 대부분 자연을 소재로 하였거나 또 그것과 연관된 시상을 이끌어 내어 쓴 작품이 많다.
시행마다 절묘한 메타포로 그곳의 풍광과 심상image을 형상화함으로써 그곳 풍광의 멋과 시의 멋스러움을 한껏 고조시켜 준다. 좋은 시란 이렇게 시적 대상이 되는 사물에서 ‘생명의 소리를 받아 적’을 줄 아는 시인을 일컫는 말이다. 이런 시를 쓸 수 있다는 것 또한 최성희 시인에게 ‘양구’라는 자연환경이 준 큰 선물일 것이다.
소로Thoreau의 말대로 시인은 자연의 서기이다. 우주 공간에 웅대한 자연의 숨소리를 옮겨 놓는 행위가 그것이다. 최성희 시인은 한 10여 년간 양구라는 자연공간에 살면서 “자연의 서기”가 된 듯하다. 최성희의 눈에 띄는 사물들은 대부분 시적 대상물로 승화되어 있다.
물방울 굴리며 걸어 나오는 환영그는 몇 개의 봉우리를 건너서 여기까지 왔을까두 갈래로 떨어지는 폭포의 음계 이룰 수 없는 한 문장이비파 위 수금 소리로 펄럭이고 있다
-「물소리」 부분
최성희 시인은 어느 날 “오봉산 계곡을 돌아들다/두 갈래로 떨어지는 폭포를 만났”는가 보다. 전반부에서 “벼랑 끝에 뿌리내린 물푸레나무 가지는/바위 등에 업혀 물방울을 굴리고/산허리를 돌아나가는 블랙야크 한 무리/발자국 자국마다 물소리 출렁인다”고 산의 정경과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모습을 아주 리얼하게 묘사한다. 그러나 후반부에 이르러 비약시키듯 “그 물소리가 잠자던 내 기억 한 페이지로 흘러든다”고 회상한다. 그 회상은 “구곡폭포에서 만나자던 한 사람”을 인유引喩하는 것이다. ‘물소리’를 매개로 한 시적 발상과 시적 전환의 상승작용이 이 시의 묘미를 극대화 한다. 절창이다.
연못이 하늘로 돌아갈까 하여
수초水草 군사 한 무리도
세워 놓고 갑니다
- 「연못 속에 내려온 하늘」 부분
사과의 상처는 흠집으로라도 아물었는데
맞아서 골병든 이모의 몸에는
옹이로 박혀 있다
달빛 든 날
우박처럼 내리치는 이모부의 주먹질을
서걱 서걱 도려내고 있다
-「사과 흘림체」 부분
「연못 속에 내려온 하늘」은 자연물들이 한 덩이로 동화되어 노는 낭만적인 시다. “하늘이 내려와 연못 속에 쉬던 날/수련은 구름 품에 잠들고/금붕어는 하늘에서 놉니다”이다. 뛰어난 풍유적 발상이다.
「사과 흘림체」는 애련지심이 동動하는 시다. 화자는 이모로부터 사과 상자를 선물 받고 그 사과 속에서 멍든 사과를 발견한다. 멍든 사과에서 마치 “우박처럼 내리치는 이모부의 주먹질”에 맞은 이모의 상처로 의인화하여 그 상처를 “서걱서걱 도려내고 있다”라고 승화시켜 낸다. 옛날 우리의 이모들이나 어머니들은 얼마나 많은 주먹질의 상처로 살아왔던가! 문득 돌아가신 우리의 어머니들이 생각난다.
해설 _ 이영춘(시인)
저자 약력
최성희
· 2018년 『상록수 문학』으로 등단하여 시집으로 『달의 문패』가 있다. 61회 강원 사랑 시화전 작품 공모전(박수근 빨래터)대상, 62회 강원 사랑 시화전 작품 공모전(박인환 문학관에서)은상, 양구 단오제 백일장(웃음) 장원을 수상하였다.
· 춘천 <시를 뿌리다> 시문학회 회원, 강원 문인협회 및 한국 문인협회 회원, 양구 청춘 문인회 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 서울에서 살다가 산골이 좋아 지금은 한반도 정중앙 ‘양구’에 터를 잡고 산새, 들꽃, 바람, 흙, 별들과 함께 살고 있다.
· 강원문화재단 후원으로 두 번째 시집 『양구의 봄』(2025)을 발간하였다.
old404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