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상상인신춘문예 시 당선자 _박재우
당선작 _ 배럴아이 외 4편
심사위원 _ 김기택 마경덕
배럴아이
나는 자꾸 몸을 웅크립니다 밥 먹을 때에도 굶을 때에도 책을 볼 때에도 태아가 된 기분이어서 나는 나의 자세가 좋습니다 네, 물속입니다 심해어죠 감춰놓은 마음이 훤히 보이도록 투명하지만 여긴 너무 어두워 검은 물고기라 불러도 빛 속에서는 나를 볼 수 없을 테니, 그런 별명이 무척 맘에 듭니다
나 밖에 없는데 내 생각 밖에 없는데 혼자가 아닌 세상, 일인칭은 이인칭의 부제 같아, 몸을 웅크리면 당신 냄새에 배꼽이 간질거려 배꼽을 후벼팝니다 배꼽이 사과처럼 익습니다 고름이 맺히면 썩은 사과에서 사과나무가 발아하듯 나는 나를 발아할 수 있을까요
나는 지하철 계단을 좋아해요 나는 쉽게 사라질 수 있죠 어둠과 빛 어느 쪽으로 통행해도 간섭받지 않죠 그저 일상이 된 생활을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1호선에서 2호선으로 환승하고 다른 역 다른 출구로 나오면 환승과 환생이 자꾸만 헷갈리는 아저씨, 여섯 층계쯤 위의 빛과 어둠에 나뉜 얼굴이 반쪽이 되어 웅크리고 있어요 나는 주머니를 뒤져 동전 한 닢으로 아는 척해요 아저씨는 우주의 뱃속에 든 태아라고 나는 믿어요 저렇게 큰 태반은 세상에서 처음 보아서 아저씨가 길을 잃을까 봐 둥둥 떠오를까 봐 살짝 걱정이 돼요
내가 나를 볼 수 없어서 나는 지금 웅크립니다 눈 뜨지 않는 태아의 세상,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어요 아니 평생 눈 감지 않는 물고기처럼 꿈꿀 수 있어요 나는 좀 더 깊이 무릎 사이에 얼굴을 넣습니다 스르르 따뜻해져요 졸려서 나른해서 잠들 것 같아요 눈꺼풀 속으로 비췬 햇살이 당신의 하혈처럼 눈을 감싸요 이런 비린내 오랜만입니다 곧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요
정오의 벤치
한 사내가 제 그림자를 깔고 누워있다
고요하다, 이끼를 덮고, 꿈을 꾸짖듯
천년 잠에 빠진 바위와 나란하다
공원의 활기와 정오의 해가 이마를 꾹 누르자
땟물 맺힌 잠의 미간이 팔을 조금 끌어 덮는다
순간, 팔에서 침처럼 끈끈한 그림자가 흘러내려
햇살의 모이를 쪼던 바닥이 그의 누추한 신발만큼 물러선다
대개 그림자는 바닥에 끌리는 동안 수많은 타액에 더럽혀지는데
함부로 버려진 꽁초, 값을 치르지 못한 술, 욕지거리가 한 호흡에 빠져나오지 못해
자꾸 덜컹거리는 잠
아무도 침범하지 않는 세상은 무해한 동물일까
은밀한 폭주족처럼 의자는
검은 부대를 숨긴 시간의 내리막길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흩어지지 않으려는 물방울의 연대가 작은 물결을 일으켜
비린내 꼬이는 수면의 반영은 첨예하다
쿠션도 없는 요 위의 잠에서 밀려난 세상이 편각으로 흘러내린다
잠시 의자에서 알코올처럼 흘러내리던 사내는
저문 정오의 밖으로 빠져나오려는 정오의 그림자를
언제 그랬던 뒷골목의 기억으로 움켜쥔다, 세다
연못에 뜬 잔영이 모래처럼 가라앉는다
데바나이프
활어노점 사내가 데바나이프로
막 퍼붓기 시작한 소나기를 끊어내고 있다
우산을 들고 줄 서있던
노인 몇 빗발의 발길질에 발길 돌리고
바다의 내장을 훑으며
붉은 비의 발목이 도마 아래로 툭툭툭툭 흘러내린다
비의 지느러미와 비의 아가미에서
설악의 벼랑을 숨긴 안개와 속초 연안에 쏠리는 비린내를 잘라내면
비는 비로소 그 특유의 역동성을 잃고 파닥임을 멈춘다
그때까지 사내는 통나무도마처럼 말이 없다
아니, 사내는 칼등처럼 우직한 어깨로 이미 안다
사내에겐 오직 죽음에 닳아 없어질 칼의 운명과
칼날을 받아내며 끝내는 버려질 도마의 운명이 있을 뿐이다
눈과 코와 입에 오래 칼이 지나가 나이가 다 지워진 도마의 내성과
매일 벼리지 않으면 녹에 먹히고 마는 칼의 생리가 부딪혀
마지막 남은 비의 몸통에서 뼈까지 발라내면
행인 몇은 훅 콧속을 파고드는 편백나무 향에 쓰러질지도 모르지만
도마의 용도는 나무의 기억과 향을 다 걷어낼 때 비로소 유효한 법,
사실, 칼은 도마를 내려침으로써 나무에서 도마를 불러내는 중이다
사내의 등을 타고 오르는 희뿌연 체열이 거리의 풍경을 손질하고 있다
툭툭 빗발이 잦아든다
투명한 비의 살점을 담고
빵빵하게 부푼 비닐봉지가 골목으로 사라진다
겨울의 내부
새는 생애에 딱 한번 몸을 바닥에 누인다고 한다
가는 가지를 움켜쥐느라 갈래진
두 발 나란히 눕히고
한눈으로 자기가 도약한 곳을 바라보다가
서서히 눈이 땅을 후벼 들어간다고 한다
온몸에 일어선 물결이 그를 어디론가 떠밀고 간다
그 어디는 누운 새와 나뭇가지의 거리쯤이라고 한다
그 거리에는 나무의 그늘이 파본처럼 쌓여 있고
갓 말을 배우기 시작한 바람의 붉은 목젖이 발견되기도 하는데
나는 그 어스름 같은 빛에 들어
읽히지 못한 채 쌓여 있는 책을 들춰 보곤 하는 것이다
그러다… 그러다가 모든 문장이 목젖을 잃고 쓰러진 바람의 이야기로 끝나기 전에
어둠 한 채 딱 들어맞는 문을 걸어두는 것이다
의미를 다 쓴 새는 이미 새가 아니듯
생의 미동을 잃고 누워있는 물결,
대지에 겨울이 왔다, 대낮인데
밤의 염장이가 와서 대지의 두 발을 묶고
두 손을 묶고 허공으로 꺼져 들어가는 두 눈을 덮고 갔다
그러나 나는 이미 안다
새의 눈알이 땅을 끝없이 후벼 들어가기에
그곳은 또 다른 공중, 나무는 맘껏 뿌리 뻗고
얼어붙은 물결 속에 여전히 강은 흐르고 있다
그게 겨울의 내부라면
그는 이제 무엇을 시작하는 걸까
열기 위해 닫혀있는 문,
닫히기 위해 열려야 하는 문이 있다
그는, 끝나지 않는다
물의 기원
첫 불을 댕기면 곧장 어둠이 달려든다 수면을 뛰어가는 새의 방향은 바람이고 발목이 붉은 돌은 강에 배를 맞춰보는 물수제비의 형식으로 가라앉는다 파장에 밀려오는 촌각들, 태양의 부스러기가 슬어 강가장자리마다 모래톱이 첨예하다 당신은 수장을 원했다 모태 속으로 뛰어드는 시월의 꽃이 행성을 흔든다 나는 화장한 통증 위에 배를 띄운다 木函에 남은 열기가 배를 밀고 간다 당신은 배 아래에 배를 맞댄 샴쌍둥이처럼 나를 쳐다본다 물 밖과 물 안에 경계가 없어 당신과 내 자리가 하나의 물노을에 탄다 밤이 흑요석으로 굳어간다
당선소감 _ 박재우
요즈음에 들어 달을 바라보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만월이든 조각달이든 매일 떠오르는 그 빛 때문에 세상 구석구석 어둠을 볼 수 있어서 좋습니다. 허공을 맴돌지 않고 그대로 바닥으로 뛰어내려 산산이 깨어지는 달빛! 어둠에 주눅 들지 않는 그 빛이 좋습니다. 그 길을 걸으면 깨어진 달빛의 부스러기가 일어 가장 낮다는 생의 밑바닥도 그믐을 지나서 오는 달 같은 예쁜 신발을 신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좋습니다.
시 쓰는 일도 바닥에 내려앉은 달빛과 같아서 부딪히고 깨어지지 않고서는 세상의 후미진 어느 한 부분도 비출 수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앞으로 낮은 곳에 부딪혀 깨어지는 달빛의 파열음에 더욱 귀 기울이겠습니다. 햇빛의 화려함에 기죽지 않는 달빛 같은 시를 쓰겠습니다.
부족함이 많은 제 시에 흔쾌히 손을 들어주신 심사위원 김기택 선생님과 마경덕 선생님, 상상인신춘문예 관계자 선생님들께 머리 숙여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앞으로 더 잘 쓰라는 채찍이라 여기며 떨리는 마음으로 시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겠습니다.
심사평
본심에 올라온 열일곱 분의 응모작은 언어를 다루는 능력이 뛰어나고 고른 수준을 보여주었지만, 구체적 경험이 지나치게 추상화되어 공감하기 어려운 시들도 적지 않았다. 자신이 쓰고 싶은 대로 쓸 것인가 타인의 잣대에 자신의 시를 맞출 것인가, 이런 고민이 시 쓰기의 자유를 조금이나마 제약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 심사위원이 집중적으로 논의한 작품은 「판금공장의 날들」 외 5편, 「오늘 난 어제의 식탁에서 흘러내렸죠」 외 4편, 「배럴아이」 외 4편, 「소로우와의 산책」 외 5편 등이었다.
「판금공장의 날들」 외 5편은 노동자들의 일상이나 죽음의 문제 등을 자연의 이미지와 결합하여 진술하는 방법이 주목할 만하다. 농촌에서 성장하여 산업화한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이 겪을 만한 가치관의 혼란 속에서 시의 미학을 찾으려는 접근 방식이 참신하게 느껴졌다. 반면에, 이 응모자의 주된 창작 방법은 낯설게 하기인데, 그것이 때로는 인위적으로 보였다. 「오늘 난 어제의 식탁에서 흘러내렸죠」 외 4편은 의식의 미세한 흐름을 관찰하여 극적인 구조를 가진 이야기로 풀어내는 능력이 돋보였다. 그라피티를 보면서 “나는 증상입니다”라고 진술하는 데서 보듯이 당돌하고 강렬한 태도와 고정관념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발상에서 신선한 패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이야기 사이의 비약이 잘 와닿지 않을 때도 있었다. 「배럴아이」 외 4편은 오감으로 포착한 대상을 장악하는 관찰과 묘사가 특징이다. 시는 투박하지만, 웅크림의 느낌에서 태아와 심해어의 이미지를 끌어내거나 활어의 생동감을 소나기 이미지로 풀어내는 상상력이 주목할 만했다. 「소로우와의 산책」 외 5편은 서정적인 감성이 뛰어나고 침묵과 여백을 활용할 줄 아는 능력이 돋보였다. 감각을 통해 들어오는 대상이 충분히 육화되었다는 것, 대상과 일체가 된 이미지의 활달한 운동을 묘사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수묵화 속으로 들어가 고요하게 명상하는 듯한 체험을 주기도 한다. 이러한 상상력이 현실의 구체적인 경험을 뚫고 나온 것이라면 더욱 힘이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마지막 논의 과정에서 어느 한 작품을 수상작으로 결정하려 하면 다른 작품의 장점이 눈에 띄어서 번갈아 작품을 들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네 응모자의 작품이 지닌 장점을 다 살려주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숙고 끝에 「배럴아이」 외 4편을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 응모자의 시가 현실의 경험을 이미지로 변환하는 과정의 상상력이 아주 유연하고 그 상상력이 사유를 확장하는 힘을 갖고 있다는 점을 높게 평가했기 때문이다. 당선을 축하한다. 계속 정진하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_ 김기택(글)・마경덕
박재우 시인
경남 김해 출생
2023년 상상인신춘문예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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