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의 기원-
BC 2600년경 탁록대전(74회의 전투, 수천만명 사망) BC 2517년 염제 신농(재위 BC2517-2475년), 산동성 곡부에 나라를 열다 * 일부 기록에서는 BC 2737년 전후를 신농의 시대로 봄 B.C 1066년 서주 파촉(巴蜀, 사천성 중경부근)에서 차재배가 행해짐(史記) * 이후 "춘추전국시대(B.C. 722-221년)에 한민족과 소수 민족에 의해 차의 재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기록 BC 59년 前漢(B.C 59), 왕포라는 선비가 적은 노비매매문서「憧約」 * 무양(사천성 성도)에서 차 사오기, 차 끓여 접대하기, 다구 정리 등 기록
일반적으로 신농의 차와 관련된 이야기를 기원으로 보는데 이때의 차는 생잎을 약용으로 씹어먹는 수준
중국 사서(史書)인 <이아(爾雅)>의 '석초편(釋草篇)'에 나오는 (도)를 茶의 뜻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으나, 이견이 많음(茶 苦菜)
-삼국(220-265), 위진 남북조시대(265-587)- 삼국시대에 이르러 일정한 제다공정을 거친 가공된 차를 음용
(참고) 삼국시대의 차 이야기 : 유비현덕과 차
삼국시대에 유비(劉備) 현덕(玄德)이 아직 돗자리를 짜고 있을 때 그의 어머니는 현덕에게 낙양(洛陽)의 명차를 죽기 전에 한 번 맛보고 싶다고 하였다. 이에 현덕은 곧 짐을 싸들고 천리길을 떠나 낙양에서 온 상인들에게 지니고 있던 돈을 모두 바치고 얼만큼의 차를 달라고 사정하였다. 당시의 차값은 오늘날로 치면 보석과 같은 정도였으므로 시골 청년의 푼돈이 차값을 치룰 만큼은 되지 않았지만 상인들은 현덕의 효성에 감탄하여 한줌 쥐어 주었다고 전하고 있다(돌아가는 길에 황건적에게 차는 물론이고 허리춤에 차고 있던 보검까지 뺏겼지만 후에 장비의 도움으로 되찾았다고 한다). 즉 당시의 차는 그만큼 대중들과는 거리가 있던 사치품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삼국이 끝난 후 서진(西晋) 때 장재(張載)는 '등루시(登樓詩)'에 "향기로운 차가 음료중에 으뜸이다" 라고 읊었다. 이어 동진(東晋)이 들어섰는데, <진중흥서(晋中興書)>에 의하면 사안증(謝安曾)은 손님을 초청하여 다과(茶果)를 내놓았다고 한다. 이런 사실들로 보면 이때쯤 왕실이나 귀족사회에서는 차를 마시는 습관이 상당히 보편화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鼎食隨時進 솥 안의 온갖 음식 때때로 올라오는데 百和妙且殊 백 가지 요리는 미묘하고 또 뛰어났도다 芳茶冠六情(淸) 향기로운 차는 육정(六情, 六淸 마시는 음료)에 으뜸이요 溢味播九區 넘치는 맛은 천하(九區)에 가득하구나
동진이 망하고 남북조(南北朝)시대가 열린다. 남북조(南北朝) 시대의 남조란 동진을 멸망시킨 뒤 세운 송(宋), 제(齊), 양(梁), 진(陳)을 거쳐 수(隋)에 이르는 170년간, 장강(長江) 유역을 포함한 중국의 중부 지방을 지배한 한족들의 왕조를 말하며, 북조란 북위(北魏)로부터 시작하여 북제(北齊), 북주(北周)를 거쳐 수에 통일되는 150여년간, 황하(黃河)로부터 장안(長安), 낙양(洛陽) 남쪽까지의 화북지방을 다스린 선비(鮮卑)족의 왕조를 말한다. 즉 중국의 북쪽은 선비족이 다스렸고 남쪽은 한족이 다스린 대립의 시기였다.
이때 북위(北魏)의 팽성왕(彭城王)은 유호(劉鎬)가 남제(南齊)에서 귀순한 왕숙(王肅)에게서 차 마시기를 배워 즐기자, "임금이나 재상이 진미 요리를 마다하고 하인들처럼 물이나 마시다니.." 하면서 비웃었다 전해진다. 그러니까 5세기 무렵까지만 해도 중국의 북쪽에서는 아직 차 마시는 것을 그다지 좋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남북조시대를 마감하고 중국을 통일한 수(隋)나라 때는 문제(文帝)가 두통을 차를 마셔 해결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수나라가 차 문화의 보급에 공헌을 하게 된 것은 운하를 대대적으로 건설하여 남쪽 지방의 차를 북쪽으로 손쉽게 운반할 수 있도록 만든데 있다.
-당나라(618-907) 차 마시기의 보편화, 茶道 정립- 대중적인 차문화가 형성되어 상류사회뿐만 아니라 서민사회까지 보편적인 음다풍조가 성행, 위구르(몽고), 티벳 등과 다량의 차 교역.
당(唐) 때에는 차 마시는 습관이 장안(長安)의 시중까지 퍼지게 되었다. 현종 때 봉연(封演)이라는 진사가 있었는데 그가 쓴 견문기에는 이런 글이 실려 있다. "태산(泰山)의 영엄사(靈嚴寺)에는 강마대사(降魔大師)라는 스님이 있는데 좌선을 할 때면 차를 즐겨 마셔 모든 이들이 그를 본받았기 때문에 차 마시는 것이 하나의 풍속이 되었다." 이 풍속은 산동(山東)으로부터 장안(長安)에 전해져 장안에는 곧 다관(茶館)이 생겼고 돈만 있으면 모든 이들이 차를 즐겼다고 한다.
당시는 찻잎을 따서 찐 다음 쌀과 함께 절구에 넣고 빻아 빈대떡 모양으로 굳힌 병차(餠茶)인 고형차를 다시 약연(藥硏)에다 넣고 갈아 가루로 만들어 뜨거운 물에 타서 마셨다.
이 무렵 차를 마실 때는 감초나, 파, 생강, 매실, 감귤, 사향 따위를 첨가하여 죽처럼 걸쭉하게 만들어 먹는(百沸茶) 습관이 유행하고 있었는데, 茶聖 陸羽는 차만을 달여서 소금으로 간을 맞추는 방법으로 차를 마셨고 그 외의 것들을 넣는 것은 좋지 않은 습관으로 쳤다.
茶道의 성립 : 陸羽의 「茶經」(765년경) , 精行儉德
육우의 <다경(茶經)>을 계기로하여 8세기 중엽에 이르러 중국의 다도(茶道)는 비로소 제대로된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차에 대한 세금은 당나라 때부터 생겼다. 당나라는 차값의 1할을 세금으로 거두어 들였으나 차츰 이 비율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차를 취급하는 상인이 지나는 길목에서 또다시 세를 징수하였기 때문에 밀거래가 늘었다고 한다.
-송나라(960-1279) 세련되고 화려한 차문화- 차의 대중화와 더불어 차의 제조법도 개량되어 연고차와 연말차(硏膏茶?硏抹茶 - 일본 말차의 원형)로 발전하였다. 연고차에는 용뇌(龍腦), 사향(麝香) 따위의 고급 향료가 첨가되어 궁중으로 들어가는 공물로 귀중하게 다루어졌는데 복건(福建), 건안(建安)의 연고차가 특히 유명하였다.
송(宋) 때에는 차에 대한 세금을 다세(茶稅)라 하지 않고 다과(茶課)라 하였다. 송나라는 북쪽으로 요(遼)와 금(金)가 군사대립이 잦아 일부 상인들에게 차의 전매특권을 부여하고 세를 거두었는데, 차가 널리 보급되어 생활필수품화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에 송의 재정수입의 1/4이 차의 전매수입에서 들어올 정도였다.
-원나라(1279-1367)- 중국을 원(元)이 지배하면서 차 마시는 습관은 북방의 유목민족들에게도 널리 전파되었다. 그들은 차에 버터나 밀크를 타서 마시곤 하였다.
-명나라(1368-1644) 포차(泡茶)법 대중화- 명 태조의 칙령 : 團茶 폐지, 제조과정이 간결한 잎차 보급 泡茶法(炒靑法이 개발), 현재 중국의 다도는 명?청대의 것을 계승
명(明)의 주원장朱元璋이 정권을 쥐면서 그는 지금까지의 차 제조법이 너무 어려운 것을 감안하여 이를 개량토록 하였다. 이에 잎차를 솥에서 덖어내는 방식의 개발되었고, 이때부터 잎차(葉茶)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 이에 따라 남쪽 복건지방의 단차보다도 절강(浙江)이나 안휘(安徽), 강소(江蘇) 등 화중 지방이 차의 명산지로 부각
그리고 이 때부터 오늘과 같이 뜨거운 물에 차를 우려마시는 포다법(泡茶法)이 대중화하게 된 것인데 그 중에서도 다관에 끓인 물을 절반 붓고 차를 넣은 다음 잠시 뚜껑을 닫았다가 다시 물을 붓고 잠시 기다렸다가 마시는 중투법(中投法)이 유행하였다.
또한 뚜껑이 달린 찻잔에 뜨거운 물을 붓고 찻잎을 띄워서 찻물이 우러나면 뚜껑을 비스듬히 하여 틈새로 차만을 따라 마시는 충다법(沖茶法)도 이때부터 시작한 방법이다.
다기로는 광동(廣東) 조주(潮州)의 조그마한 다완(茶碗), 다호(茶壺)가 유명해지고 찻잎을 보관하기 위한 엽차호(葉茶壺)도 등장하였다. 차의 온도와 향을 유지하기 위해 다완에 뚜껑을 덮은 개배(蓋杯)며 개완(蓋碗)이 등장한 것은 명이 끝나갈 무렵이다.
-청나라(1644-1911) 화차(花茶) 및 보이차의 유행- 운남 보이를 제외하고는 거의 잎차가 됨 서양과 통상으로 차와 도자기를 수출(영국, 미국, 러시아 등)
청(淸)이 들어서고 부터는 말리화 따위의 꽃잎을 넣는 화차(花茶)가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이때가 되면 지방도시에까지 다관(茶館)이나 다루(茶樓)가 들어섰다.
유럽인들이 차를 처음 알게 된 것은 16세기 중엽이며, 아시아의 식민지화와 기독교의 선교과정에서 서양에도 차 마시는 습관이 널리 퍼지기 시작
-近代이후 중국공산정권과 대만정부의 상반된 茶정책- 중국 공산정권 수립으로 청차의 민간 행다법은 자본주의의 퇴폐문화로 간주되어 탄압된 뒤 점차 퇴색됨 대만정부는 청차문화를 상업화하여 세계 차시장에서 성공을 거둠. -이상이 중국 차에 대한 일반적인 내용입니다-
제가 중국에 살고 있는데요...... 차를 사러 많이 다녀봅니다만......무엇이 좋은 차이냐? 라는건 무슨음식이 좋은 음식이냐와 비슷한 질문 갔습니다. 우리나라 한식에서 무엇이 좋은 음식입니까? 뭐 쉽게 한우가 좋다고 칩시다(제가 등심을 좋아 하므로) 그러나 등심만 먹는다고 생각 해보세요. 몇일만 먹어도 질려서 못먹을꺼예요. 김치도 먹어야 하고 채소도 먹어야 살죠......어떤이는 소고기 못먹는 사람도 있으니 암만 좋으면 뭐합니까? 대충 떠들어 봤구요......
중국에 잇어 보니까 현지인들은 운남 보이차를 좋은 차로 쳐주는거 같아요. 뭐 한국 사람들은 용정차가 좋다고는 하지만 용정차가 알고 보면 사실 별게 아니더라구요 저도 중국와서 알았지만 그냥 녹차던데요. 차집 아가씨 한테 물어보니까 새순이라고 하나 녹차를 보면 새순 끝에만 잘라서 모은게 용정차라고 하더라구요. 가격도 그리 비싸지는 않아요. 제가 알기론 가격이 비싼게 좋은것이겠죠? 중국에서 보면 보이차를 신문에 말아 놓은게 잇는데 그게 비싼거는 몇백만원이래요 500g에 보이차는 운남지방에서 나는데 정말 귀한차는 예전에 신문으로 일부러 싼데요 신문에 왜 날짜가 있자나요 보이차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좋은가 봅니다. 그래서 귀한차는 예전 발간된 그 신문에 있더라구요...... 저도 차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하지만 생차와 말린차로 구분하고 가격도 워낙 천차만별입니다. 보편적으로는 하여튼 보이차와 철관음이 비싼데요 저는 개인적으로 철관음차를 선호 합니다. 마셔보면 입안이 개운해지는게 기분이 좋아 지더라구요...... 좀 비싸기는 하지만...... 그리고 국화차 ㅋㅋ 이것 저 못먹는데요 맛이 없어서 중국인들은 특히 여자들은 국화차를 좋아 하더라구요 가격도 무지 싼데 마음을 정화 해준다나???
각 차마다 다 싼거도 있고 비싼거도 잇는데 일단 중국 현지에서는 보이차가 으뜸인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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