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최문자 신작 시집 『해바라기밭의 리토르넬로』가 민음의 시 295번으로 출간되었다. 『우리가 훔친 것들이 만발한다』 이후 3년 만에 출간하는 신작 시집이다. 이번 시집은 시력 40년에 달하는 최문자 시인의 일관된 시적 지향성에 더해 한층 깊어진 사랑에 대한 탐구가 눈길을 끈다. 본질에 대한 인식으로 진전되며 존재론적 성찰까지 도달하는 ‘사랑’의 가능성이 최문자의 깊어진 시 세계가 가리키는 또 다른 가능성을 예감케 한다.
리토트넬로는 ‘돌아오다’라는 뜻의 이탈리아어다. 음악에서 사용하는 표현으로, 대조되는 성격의 삽입 악구들 사이에서 반복되는 부분을 가리킨다. 시집의 제목이자 표제시의 제목이기도 한 ‘해바라기밭의 리토르넬로’는 거대한 해바라기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과 함께 만들어 내는 물결 속에서의 공간적인 움직임과 함께 해바라기의 한 생애가 만들어 내는 시간의 움직임도 연상시킨다. 누구에게나 시간과 공간의 변화들 사이로 반복되는 비밀스럽고도 근원적인 감정, 혹은 스토리가 있다. 그 자리로 또 돌아오게 만드는 복잡다단한 감정과 이야기 들을 가리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랑은 최문자 시의 미학적 특이성이 출발하는 시작점이다.
이번 시집에서 최문자가 말하는 사랑은 개인의 경험에서 출발해 가족적, 공동체적 층위를 거쳐 신이라는 종교적 층위로 상승하는 모습을 보인다.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사랑의 보습은 대상과의 충만한 합일이 아니라 상실하거나 훼손된 관계에 대한 회상이나 회한으로 점철되어 있다. 사랑의 상실과 좌절에서 촉발되는 상처와 고통이 사랑의 본질에 대한 인식을 거쳐 존재론적 성찰에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사랑하는 대상의 상실과 그로 인한 부재를 상처와 불행의 언어로 노래하지만 그럼으로써 사랑과 그 대상을 소유하고 나아가 영원의 차원으로 승격시키는 세계. 최문자의 사랑은 ‘더 큰 사랑’이고 ‘더 영원한 사랑’이다.
■ 슬픔을 숙성시키는 죽음
더 큰 사랑으로 가는 길엔 ‘죽음’에 대한 경험이 있다. 『해바라기밭의 리토르넬로』는 죽음의 사건이나 아우라가 이전 시집에서보다 더 강렬한 강도와 높은 밀도로 등장한다. 이번 시집에서 ‘죽음’은 사랑-상실-회상-성찰로 이어지는 기존 시 의식의 내적 진행과정에 개입해 중요한 지각 변동을 일으킨다. ‘익는다’라는 양태의 서술어, ‘못’이라는 내면적 정신의 이미지, ‘발’이라는 신체 기관의 이미지를 비롯해 시간과 공간의 바깥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이전과는 달라진 죽음의 의미가 공허와 허무의 심연 속에 복잡다기한 흐름을 만든다. 성찰된 죽음을 관통한 사랑은 이전의 사랑과 같을 수 없다.
■ 시공의 바깥으로 성숙
시간에 대한 인식은 최문자 시의 기본을 이루는 대표적인 요소다. 이번 시집에서도 시간은 중요한 모티프로 등장한다. 특히 시적 주체의 시간 인식은 시간의 흐름에 대한 순응과 저항 사이에서 진동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크로노스가 시작에서 종말에 이르는 세속적 시간으로서의 연대기적인 사건이라면 카이로스는 기회의 시간으로서 한순간에 모든 것이 응축되는 시간이다. 최문자는 특정 시간을 정지시키는 인식에 대해 각성하는 모습을 통해 시간의 순행적 흐름을 인지하면서도 그것을 내부에서 변용시키는 시간으로서의 카이로스를 추구한다. 흐름과 멈춤이 공존하며 흐름도 멈춤도 아닌 시간, 시간의 바깥을 가능하게 한다.
■ 더 큰 사랑으로 회귀
이번 시집을 통해 최문자 시인은 개인적 사랑의 차원을 공동체적 사랑의 차원으로 승화함으로써더 큰 사랑으로 회귀하는 성숙한 인간의 모습을 탐구한다. 슬픔과 고통으로서의 사랑이 숙성과 무한한 시공으로의 심연을 거쳐 더 큰 사랑으로 돌아오는 과정은 인간에게 고통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한 조각 답인 것도 같다. “늘 견디지 못하고 세상으로 나오는 굽은 못”이 “나선형”인 것처럼 최문자 시의 사랑의 행로 역시 순환적 반복을 통해 원주를 넓히며 더 큰 사랑으로 회귀한다. 고통받는 인간만이 더 큰 사랑으로 회귀할 수 있을 거라는 숭고한 탐구로 최문자의 시 역시 회귀한다.
■ 시인의 말
다시 해바라기밭으로 간다.
바깥으로 나가려는 물고기 자세를 하고
오래된 집을 떠난다.
거기 사는 시계들
창문을 열어 줄 것이다.
■ 해설에서
무시간성이 지배하는 무의식의 심연에서 최문자가 제시하는 시 의식의 이정표는 ‘사랑’의 상실에서 발생하는 ‘슬픔과 고통’을 숙성시켜 ‘죽음’에 도달한 이후에 그 죽음 너머에서 “끝 그다음”의 시간과 공간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갈 때 만나는 세계를 가리키고 있다. “모두 넘어지고 쓰라린 아픈 자국을 가리고” 있는 “인간”에 대한 연민은 시적 주체가 자신의 ‘슬픔과 고통’을 숙성시켜 ‘죽음’에 도달한 이후에 “끝 그다음”의 시간과 공간으로 진입할 때 얻어지는 승화된 사랑의 모습이다.
-오형엽(문학평론가) / 해설에서
저자 소개
최문자 시인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나무고아원』, 『그녀는 믿는 버릇이 있다』, 『사과 사이사이 새』, 『파의 목소리』 등이 있다. 박두진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야립대상 등을 수상했고 협성대 총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배재대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목차
시인의 말
1부 호모 노마드
몇 개의 발화 13
호모 노마드-3이라는 숲 15
호모 노마드-도형들 19
호모 노마드-바깥에서 22
호모 노마드-무한 시선 24
호모 노마드-이름 26
호모 노마드-발 28
호모 노마드-예측하기 30
호모 노마드-나는 언제 자전하나 32
호모 노마드-아, 시간 34
호모 노마드-비행 35
호모 노마드-피란처 36
호모 노마드-동행 38
호모 노마드-지도 40
2부 Nothing
시계의 아침 45
청춘 48
생각의 집 50
경이로운 그들의 눈보라 속에서 52
수선화 감정 55
친밀감 58
처음 집시 60
그 나무 62
‘나’라고 할 것인가? 64
Nothing-지우개 66
Nothing-위험한 식사 68
Nothing-5분70
거짓말을 지나며 72
Nothing-봄에는 75
3부 재
뒤로 가는 밤 79
발소리 80
해바라기밭의 리토르넬로 82
지향성 85
빈 노트 88
어제의 숲에서 중얼거렸다 90
선택 92
눈물쇼 94
꽃을 스치고 죽음을 스치고 96
눈보라 시대 98
양띠 100
수요일 102
시인은 빵을 떨어뜨릴 수 있다 104
어제의 개천 106
크로커스 꽃으로 108
4부 끝
끝 113
허공에서 115
허공에서 116
공을 이해하기 117
줄무늬 120
무음의 밤 122
얼굴 124
빈 손 126
사랑의 불확실 128
2020년 129
두부 130
한 사람 132
자장가 134
어머니 136
불편한 여자 137
재 139
작품 해설 / 오형엽(문학평론가)
시공(時空)의 바깥, 무의식의 심연과 더 큰 사랑 141
■ 본문 중에서
오래된 아버지의 괘종시계 아래서
그때 그때의 말을 사과하며
소리가 나지 않게 신발을 벗고
왈칵 쏟아지는
기억 몇 때문에
시간을 검은 콩처럼 익었다
아버지와 나
둘만 있어도
아버지라는
그 슬픔 내가 알아
열 가지 이상의 슬픔이 섞여 있지
그 슬픔 곁에 누웠다 온 이야기 쓰려고 불을 켰었죠
아버지는 커다란 해바라기 꽃을 좋아했다
아버지의 해바라기를 달고
꽃이 커요
너무 커요
소리쳤지만
아버지가 늘어진 실을 당기면
내 단추들은 툭툭툭 여러 번 떨어졌다
-「해바라기밭의 리토르넬로」 부분
나는 겨울을 제일 사랑했다
겨울은 무겁고 아무것도 상하지 않았다
쓸고 닦고 하루에 몇 번씩 바닥을 치워도
어머니는 깊은 겨울 안방에 가득했다
누가 어머니의 재를 마지막으로 치우고 나왔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생존 중이다
어디 갔다 왔는지 모르게 다시 겨울이 오고
나는 여전히 죽기 전 규칙들을 지키느라 바쁘다
사람들은 아무렇게나 땅을 차지했지만
나는 반짝이는 적들 앞에서
누군가 떨어뜨린 동전 한 닢조차 줍지 않았다
-「재」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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