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형 시집- 지문을 수배하다
조재형 시인은 1963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고, 2011년 {시문학}으로 등단했으며, ‘함시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검찰청 수사관으로 16여년간 재직했고, 현재 전북 부안에서 법무사의 일로 매우 분주한 나날들을 지내고 있다. {지문을 수배하다}는 그의 처녀시집이며, 이 시집은 두 개의 시선의 마주침에 의해서 그 힘찬 역동성을 얻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첫 번째는 무위자연으로서의 가장 성실한 자의 삶에 대한 예찬이고, 두 번째는 현대 자본주의의 삶에 대한 비판이다. 어머니와 아버지와 당숙과 지문이 없는 농부들과 지체장애인들의 삶은 전자의 예에 해당되고, 사채업자와 악덕상인과 관료들과 정치인들과 매춘부들의 삶은 후자의 예에 해당된다. 그는 현대 자본주의의 삶에, 마치 [피에타]의 김기덕 감독처럼, 가장 날카롭고 예리한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게 되고, 그 결과, 상호간의 사랑과 행복의 싹이 자라나는 공동체 사회를 꿈꾸게 된다. {지문을 수배하다}는 가장 정직하고 성실한 삶을 살아왔던 ‘지문이 없는 사람들’에게 바쳐진 시집이며, 진실에 의해서 진실의 집을 짓고, 오직 진실의 삶을 살고자 하는 조재형 시인의 절규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등록금이 바닥난 나는 대부업자를 찾는다/ 살인적 금리로 급전을 수령한다/ 원금에 이자를 보태 재대출하는 꺾기 수법에/ 이자는 원금의 두 배로 폭풍 성장한다// 갖은 강박에 유흥가 종사원으로 매매된다/ 알탕갈탕한 전세 보증금이 인질로 잡혀간다/ 영문을 모르는 식솔들이 길바닥에 나앉는다// 아직 날것인 나는 아파트 옥상에서 자진 폐업한다/ 사채 덕분에 사체가 된 나/ 사회면 머리기사로 부음을 대신한다/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서 곧 삭제된다// 모두들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OECD 조국은 대박 뉴스가 늘어 간다/ 일군의 시인들은 아름다운 강산이라고 강변한다// 묵시의 눈가림이 연속 탈출을 엄호한다/ 공화국의 주인을 자임하는 어느 누구도/ 함부로 타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다 —「사채공화국」 전문
글구멍이 막혀 살아온 농투성이, 말년에 인감을 내러 면사무소를 찾았다. 직장에서 말소된 자식의 생계를 복원해 주려 남은 천수답을 내놓은 것,// 맨몸으로 황무지를 개간하랴 중노동이 열손가락을 갉아먹었다. 십지문이 실종되었다고 민원은 반려되었다. 고추 먹은 소리로 삿대질 해본들 소용이 없다.// 몰락한 가문의 정본으로 태어난 노인, 가난을 대대로 복사한 탓에 사본 취급을 받으며 살았다. 이면지처럼 남의 집 헛간을 전전하며// 노인을 진본으로 탁본한 곳은 땅이다. 논배미 밭고랑 갈피마다 삽과 괭이로 밑줄을 그었다. 땀방울로 간인한 흔적들이 그를 소명한다.// 팔순 고개 완등하고 유효기한이 다해가는 상노인. 올봄도 황소가 끄는 쟁기에 첨부되어 논두렁으로 출석했다. 부록으로 어깨에 멘 삽날이 지문처럼 문드러져 있다.
----[지문을 수배하다] 전문
衣
배냇저고리 한 벌로
수의까지 삼는
그의 검소함을 따를 수 없다
食
햇살을 주식으로 하되
야식으로 별빛을 선호한다
한 달에 보름, 달빛을 섭취하는 그는
특식으로 단비를 즐긴다
住
자리의 높낮이를 따지지 않는다
진 데와 마른데 음지와 양지를 가리지 않는다
시골 담장이건 빌딩숲이건
자투리땅이면 보금자리를 튼다
行
대물림으로 씨족 간 다툼을 남기지 않는다
지상권을 빌미로 이웃 화초와 담을 쌓지 않는다
내가 이를 표절하고자 하나
감히 베낄 수 없다
----[민들레] 전문
그는 해맑은 소년이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내리는 함박눈처럼 맑고 따뜻한 눈빛을 가지고 있다. 사정기관에 근무하다 보면 몸과 마음이 척박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그러나 오랫동안 몸을 담은 검찰수사관 출신임을 전혀 읽어낼 수 없다. 시가 밥이 되느냐 돈이 되느냐, 뒤늦게 웬 시를 쓰느냐, 그곳에서 어떻게 이런 시가 나오느냐는 등, 불현듯 등단했을 때 내게 귀띔한 선배 시인들의 격려나 충고의 말씀이 떠오른다. 그와 진한 동지애를 느끼는 부분이다. 시를 갈구하는 마음은 그쪽 계통에 재직하고 있는 분들이 더욱 많으리라. 조재형 시인의 시는 그들의 애환을 소년의 눈으로 다독인다. 재직할 때 붙여진 독사란 별명은 틀린 말이다.
--박정원 시인
‘지구의 축이 기우뚱거리는 건/ 하늘에 매달리는 민원이 폭주하는 탓’임을 보여주는 증거들로 가득 찬 곳간을 열고 시인 조재형이 ‘오곡백과를 상재’하는 마당이다. ‘병약한 사과나무 한 그루’ 들을 돌보아 그 어깨에서 ‘자음과 모음을’ 받아내는 풍요한 가난의 결과물들. 착하고 성실한 품성을 하대하는 야비한 세상의 ‘바닥’을 써레질하여 파종한 ‘聖 배추의 잔혹사’. 새벽 한기와 해으름 그림자로 받쳐낸 ‘오래된 가난’이 그의 연장이라고 읽는다.
그에게는 러닝머신, 게시판, 식칼, 폐가의 문패, 세무서 담장 곁 은행나무 한 그루도 ‘깨물면 모두가/ 아픈 손가락’이다. 그것들이 ‘변방에 눌러앉은 어머니’나 ‘회칼잽이 사형수’나 ‘시계를 찬 전사자 유해’나 ‘수능시험 치르는 여린 딸’의 그림자를 가졌기 때문이다.
만물에서 스며 나오는 연민을 받아 적는 일이 과연 시인의 첫 업무이나, 이렇듯 나직나직 꼼꼼하기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니, 흩어진 ‘지문을’ 찾는 수사관의 섬세한 이마와 같다. ‘푸른 팔뚝을 번쩍 치켜들’고 ‘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한 시의 ‘유복자’에게 아비의 부활은 변개치 못할 신앙이겠다.
----조정 시인
시인의 진단에 따르면 2012년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은 ‘사채공화국’이다. ‘대부업자’, ‘살인적 금리’, ‘급전’, ‘꺾기 수법’ 등의 어휘에 담긴 위태로움이 가파르다. 대다수 국민들은 하루하루를 살아내기가 무척 버겁다. 많은 이들이 ‘매매’되고 ‘인질’로 잡히고 ‘길바닥’에 나앉고 마침내 ‘자진 폐업’을 하게 되는 오늘의 현실은 공포다. 수많은 ‘자살’과 ‘죽음’의 물결 속에서 우리 모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사회면 머리기사로 부음을 대신”하겠지만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서 곧 삭제”될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함부로 타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 세상은 암울하다. 영화 [피에타]에서 김기덕 감독이 보여줬던 불편한 진실의 세계가 조재형의 시 「사채공화국」에서 “사채 덕분에 사체가 된 나”라는 절묘한 어구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권온 문학평론가
지혜사랑 65번 조재형 시집 {지문을 수배하다}, 도서출판 지혜, 4X6 양장본 값 1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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