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의 사생활 - 손현숙 시집 (시인동네)
일상과 상상계를 자유롭게 뒹굴며 마침내 ‘절정’으로 향하는 손현숙 시인의 세계가 세 번째 시집으로 담겨 출간되었다. 이번 시집에서는 손현숙 시인의 시 세계 ‘중심’에 놓여 있는 시퀀스를 면밀하게 살펴볼 수 있다. 1부에서는 상상력으로 누비던 일상을 입체적으로 전복시키는 사유의 힘이 돋보인다. 2부에서는 카메라 기법처럼 세밀한 포착과 낯선 色의 향연이 작동하고 있으며, 3,4부에서는 마침내 ‘절정’에 닿게 된 감각이 수놓는 당돌하고 깊이 있는 언어들을 만날 수 있게 된다.「목련이 피었는데 죄나 지을까」하고 도발하는 시인의 돌올한 감각은 「참빗은 너무 아프고 도끼빗은 너무 성글어서」와 같은 깨달음으로 도약한다. 이것은 이 시집의 탄력을 생성하는 주요한 간극이자, 시인의 활달한 언어와 감각이 생생하게 돋보일 수 있게 하는 마찰이기도 하다.시집 해설에서도 말하듯 “빠른 시상의 전개와 그 속에 잘 배치된 구어체와 의문법의 능숙한 활용으로 경쾌한 시인이라는 인상을 풍”기던 시인은 이번 시집을 통해 삶을 통찰하는 기술로까지 언어적 상상력을 키웠으며, ‘흔들리는 중심’이란 곧 한 세계에 정착하지 않고 끊임없이 삶과 시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는 생동감이라는 것을 시인은 몸소 증명한다. 63편의 층계를 통해 일상에서 생긴 프리즘을 여과 없이 전하는 시집, 『일부의 사생활』이 침투하는 ‘전체’와 ‘중심’ 흔들기는 이 시집의 묘미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기를, 바람이 오랜 비밀처럼 하늘을 간다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지만, 아무도 되돌아오지 않았다밝음, 저 도열의 끝을 지나 한 발짝만 들어서면 죽은 자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빛으로 사람을 가볍게 당기는, 문득 걷다 보면 허밍처럼 빛을 터트리는,-「허밍처럼」 부분먼저 ‘경쾌하다’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보자. 그것은 ‘비감하다’, ‘무덤덤하다’처럼 말, 그러니까 시에서는 사용된 시어와 어조, 그 결합 방식을 특정하려는 것일 뿐, 그 외에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저기, 환하게 빛을 지고 선 사이프러스, 나무가”에서 볼 수 있듯이 특정 지점(‘저기’)을 지시하고 그곳의 조건(‘환하게’)을 확정하고 비로소 피사체 ‘사이프러스’(지시어)→‘나무’(구체적 대상)를 보는 것은 시인의 오랜 훈련의 결과일 뿐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 훈련을 기반으로 하여(“거기에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기를,”이라는 부분은 셔터를 누르는 순간의 자세처럼 읽힌다) 보다 철학적인 주제에 접근하고 있다. “소실점 뒤 문을 열고 들어서면”이라는 표현에서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것처럼, 이 작품은 아주 크게는 ‘삶과 죽음’의 문제를, 보다 가깝게는 ‘현상과 본질’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소실점’이란 일종의 시각적 사각지대라 해도 무방할 것인데, 어쨌든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나는 너머를 꿈꾼다”라고 확언했으니 지나친 비약은 아닐 것이다.포로처럼 내밀고 있던발가락 다섯 개 중 성한 것은달이 파고든 엄지발톱뿐제멋대로 자라버린 나무뿌리 같은데얘야, 요즘은 안 아픈 뼈가 없구나,한 가지 생각만으로 거칠어질 때뿌리는 죽어서도 자라는가고통이 부끄러움을 넘어서는저기, 깜깜한 살을 파고 초승달 떴다-「봐라, 초승달이 떴다」 부분시인들은 저마다 몸속에 달 하나씩을 품고 산다. 손현숙 시인은 그중에서 발톱에 숨은 ‘초승달’에 주목하고 있다. 자기의 일부이면서 가장 시선이 잘 닿지 않는 곳, 그러면서도 발목에 걸렸던 ‘그림자’를 가장 안정적으로 붙잡았던 지점, 끝내 “빛을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달과 살이 함께 집혀 검붉은 피”가 도는 순간을 형상화하고 있다. ‘달’은 차가운 ‘색, 불, 꽃’의 합체(合體)다. 어둠이 필요 없는, 반사뿐이므로 색이 아닌 색, 더 이상 불을 옮기지 않는 완벽한 재다. “달의 슬하는 제 그림자를 모르는 햇덩이의 거처입니다 아무것도 고백한 적 없는 입술도 자기 이름은 불러줄까요?(「신화처럼 거절해봐」)의 신화처럼, 또한 생명의 순환 속에 핀 최초의 꽃처럼, 시인은 ‘달’까지 포함한 어떤 비밀의 밀도(密度)를 겨냥한다.
손현숙 시인
서울에서 태어나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고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시집으로 '너를 훔친다' '손' '경계의 도시(공저),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가 있다. 2002, 2005년 문화예술위원회 문예진흥기금, 2010년 서울문화재단 창작기금, 2015년 경기문화재단 창작기금을 수혜했다.
시인의 말나는 너머를 꿈꾼다.시가,계산을 모르는목적지로 가는동행자였으면 좋겠다.2018년 1월손현숙
제1부 허밍처럼 13 마녀는 뜨개질을 좋아해 14 가니메데스 유혹 16 푸레독 18 신화처럼 거절해봐 19 꽃잎처럼 포개져서 명왕성 갈래? 20 회전문 22 나무나 나나 바람이나 뭐 24 깨어있는 꿈 25 파투 26 미안하지만, 혼자 꿀꺽 28 고양이 낙법 30 毒, 꽃으로 찾아오는 32 행간, 행간 33 너는 왜 내게 등을 보이니? 34 제2부 디졸브 37 콜링 38 데드맨, 워킹! 40 흑백필름 한 통 42 베네치아 우울 44 카메라는 사실이 아니다, 사실이다 46 시선 47 날개가 색을 묻히다 48 금병매는 금병맬까, 아닐까 49 다시 보기 50 결정적 순간 52 오늘 문장의 마침표를 찍으신 53 기일 54 한강이 없어 어떡하지? 55 봄날의 산보처럼 56 방심이 좋다 57 목련이 피었는데 죄나 지을까 58 제3부 우연한 사후 61 서쪽으로 한 뼘 62 성당과 호떡 64 진아, 65 위노나 소혹성 B14좌의 기억들 66 참빗은 너무 아프고 도끼빗은 너무 성글어서 68 꽃아, 울어라! 70 꽃, 다시 와서 아프다 72 사막인 73 누가, 입술로 안녕을 74 보시 75 패러글라이딩 ? 76 플랫슈즈는 말랑하다, 비리다 78 신은 아홉 벌의 옷을 껴입었다 80 생각으로 오는 붉은, 82 새는 불을 매달고 84 제4부 절정 87 물방울, 리플레쉬! 88 애인 코스프레 90 커피 한 잔, 이라고 그가 말했다 92 체스 94 페르마타 96 못, 준다 98 태양춤 99 봐라, 초승달이 떴다 100 햇빛으로 긁었다 102 목련은 흰 피 동물이다 104 바람 박물관 106 그림자는 두께가 없다 108 팬닝 110 물 박물관 112 해설 ‘흔들리는 중심’의 비밀 113 고영(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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