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오늘은 시를 쓰려고 애쓰지 않았습니다.” 시인 최문자의 생애 첫 산문집
시인 최문자의 첫 산문집 『사랑은 왜 밖에 서 있을까』가 난다에서 출간되었다. 1982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후 사랑과 슬픔의 힘, 깊은 상처와 철저한 자기 응시로 이루어진 시세계를 펼쳐보인 그가 처음으로 펴낸 산문집이다. 내면적 고뇌와 서정적 울림이 가득한 시의 근원을 엿볼 수 있는 귀한 자료이기도 하다. 산문이라는 형식을 빌려 시인은 슬픔이 어떤 슬픔인지도 모른 채 그 위에 너무나 많은 못을 박아왔던 자신을 “말해버린다”. 그에게 있어 “말해버리는” 것은 그 못을 뜯고 “문을 여는 것”이다. 그의 시에서 꽃피우던 언어는 산문 속에서도 그 향기를 더해간다. 그리고 20층 건물 맨 아래에 끼여 자라는 민들레로, 중환자실의 한 여인이 죽음의 순간에 부르던 아카시아꽃으로, 총장 업무에 쫓겨 급히 지나가던 그의 발목을 붙잡은 배꽃으로 피어난다. 그의 산문은 생의 빛깔을 가득 머금은 이러한 꽃들을 한 아름 엮어 만든 것이다. 시인이 종이 위에 쓴 꽃들이 기쁨으로만 만개한 것은 아니다. 가까운 이들을 죽음에게 여럿 내어주어야 했던 뼈아픈 경험 역시 꽃의 모양을 따라 녹아 있다. 그에게 “꽃 꿈은 설레는 것이 아니라 공포”에 가깝다. 흙처럼 쌓인 글 속 “다 파내고 파헤쳐진 흉터 같은 폐허”가 무섭기만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시 한 편으로 언제고 멈춰 서고 뒤돌아보고 불행을 선회할 수 있”기에, 시 한 편은 소중한 구원이 된다. “슬픔과 고독에 물든 채 상실로부터 오는 상처와 고통, 회한을 내밀한 목소리로 읊조리며 작고 섬세한 기미들을 보듬는 고백의 시”(한국서정시문학상 심사위원)를 쓰는 최문자 시인. 처음으로 출간되는 그의 산문집 『사랑은 왜 밖에 서 있을까』 역시 “막연한 어둠의 기억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 쓰인 치유의 문장들로 가득하다. “누군가가 총을 겨눠도 어떤 감정은 죽지 않고 푸르”게 살아 있다고, 그는 시로 산문으로 변함없이 말하고 있다.
“사랑에 나는 빚진 자입니다” 최문자 시의 꽃과 잎과 뿌리 시인은 자신이 “해가 지고 있는 저녁”의 시간을 지나고 있다고 말한다. “이 붉은 저녁”을 그는 “많은 기억을 품은 채 말없이 걸어가고” 있다. 산문집에서 그는 이 기억을 따라 그의 시와 삶을 지탱하고 있는 뿌리를 따라 내려간다. 그 기억들이야말로 시인의 내면에서 무한히 다른 부분들과 작용하며, “매복하고 기다리고 침묵시키고 시를 쓰게 하는 가장 오래된 동굴벽화”이므로. 시인의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기억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가 시에서 호명하는 대상이 무엇이건, 이는 무의식 속 기억이 그려나간 궤적에 의해 “깊은 곳에서 서로 붙잡고 뻗어나가며 위로 뚫고 오르는 그 무엇”, 그리하여 뿌리로부터 샘솟은 어느 이름이기 때문이다. 산문 속에 투영된 그의 시선, 그의 기억이 품고 있는 “작고 섬세한 기미들”은 하나같이 눈앞에 선뜻 드러나지 않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억들이 모여 하나의 시가 된다. 시인의 시「껍질의 사랑」은 그의 어머니가 혼잣말로 하던 “에미는 네 껍질이야”라는 말과 하나의 메아리로 연결된다. 여기에는 그가 6·25 전쟁의 혼란 속 오빠의 손을 놓치는 바람에 잠시 고아가 되어 생활했던 시절에 대한 기억과, 그를 되찾은 어머니가 보여준 애절한 사랑, 그리고 어머니라는 그 단단한 “껍데기”가 떨어져나간 후 다시 굳은살이 박이기까지의 아팠던 기억 역시 담겨 있다. “양 치는 목동의 눈이 수 킬로미터 밖 산밑에서 풀을 뜯고 있는 양의 마릿수까지 정확히 알아맞힐 수 있는 건 시력이 뛰어나서라기보다는 평소 양떼에 대한 관심과 사랑 때문”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같은 시력을 가지고 같은 지점에 서 있어도 보이는 것이 다른 것은 그동안 사랑해왔던 시간과 관련이 있다. 남에게 잘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집착하는 것이 시인의 시선이라면, 그 시선은 세상에 대한 깊은 사랑에서 말미암은 것일 테다. 산문집에서 만나는 최문자 시인은 “부드러워도 할 것 다 해내는 경직되지 않은” 총장이기도 하다. 보이지 않는 것도 보는 너른 시야를 가진 교육자가 되는 것이 시인으로서의 도리라고 여기며 협성대 총장직을 역임한 그는 그동안 수많은 젊은 이파리들을 세심히 보고 피워냈다. “잎으로 사는 것은 이렇게 많이 어둡고, 많이 중얼거리고, 많이 울먹이다 비쩍 마르”는 것임을, “길고긴 목마름의 시간도 온몸이 찌그러지는 위축증의 시간도 참아내야” 한다는 걸 아는 시인이기에 젊은 청춘들과 함께 아파하고 함께 기뻐한다. “삶의 꼭 한 부분 푸르러야 하는 절정 앞에서”, 스러지지 않기 위해 “뿌리보다 더 괴로”워하며 고군분투하는 그들을 보고 시인은 “시들 것 같지 않은 잎이다”라고 말한다. 그의 시 속, 궂은 자리에서 고개를 내민 작은 풀꽃들과 같은 존재들이다.
“흉터도 시의 기척으로 읽어주기를”
그의 시야에 보이는 것은 어린잎뿐만이 아니다. 그의 시 「닿고 싶은 곳」에 등장하는, 한쪽을 향해 구부러진 채 죽은 나무 역시 그의 시선 끝에 자리한다. 시인은 그 나무를 통해 그 너머의 무언가를, “슬픈 쪽을 향해 둥글게 등을 구부리거나 다리를 오그리고 뭔가 죽도록 바라보다 마음이 먼저 상해 하얗게 죽은” “슬픔의 하중을 받으면 갈수록 허약해지다가 버티지 못하고 쓰러져버린” 존재들을 보았다고 책 속에서 고백한다.
누구나 바라보고 싶은 대상이 있다. 거기에 닿고 싶어 하고, 그것을 바라보면서 걷고 멈추고 다시 걷는다. 그러다 가끔은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생겨난다. 걸음은 멈춰지고 더는 갈 수 없을 때, ‘닿고 싶은 곳’은 ‘슬픈 쪽’으로 바뀐다. 그러면서도 쓰러지는 순간까지 그쪽을 오래 바라본다. 결국은 슬픈 쪽, 그쪽으로 쓰러진다. _194~195쪽
어찌할 수 없는 중력에 마침내 쓰러지는 순간, 그 힘에 인위적으로 맞서기보다 다만 ‘닿고 싶은 곳’이었던 ‘슬픈 쪽’을 마주본 채 쓰러지기를. 이런 소망을 가진 시인에게 “사랑은 온 힘으로 살아내는 중력”이다. 온 힘을 다해 ‘슬픈 쪽’을 향해 쓰러진 나무의 형상은 겸허하며, 사랑이 그 몸에 남긴 흉터는 시가 된다. 최문자 시인이 “사랑은 왜 밖에 서 있을까?” 하고 생각하며, 사랑 앞에 썼다는 산문집이다. 표지로 삼은 오딜롱 르동의 작품 속 여인의 시선 끝에 꽃이 있듯이, 시인의 시선 끝, ‘닿고 싶은 곳’에도 색색의 고운 시들이 피어나고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꽃들의 꽃말은 모두 사랑이 아닐까.
가끔 상처 난 곳을 들여다봅니다. 흉터는 신비한 곳이지요. 제자리로 못 돌아가는 살점들이 굳어 있었죠. 무섭게, 고요하게 종이처럼 접히기도 하고 변형, 변색되어 있었습니다. 흉터만큼 강력한 침묵 지대가 있을까요? 쓰고 싶어도 답장할 수 없는 곳입니다. 짧은 사랑인지 영원한 이별인지 어둠의 고백인지 위험한 일을 저지르다 멈춘 곳인지, 이 책을 쓰며 달랬지요. 흉터도 시의 기척으로 읽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작가의 말에서
저자
최문자 시인, 대학교수 서울 출생. 1982년 '현대문학' 등단. 성신여자대학교 대학원 현대문학 박사. 협성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제6대 협성대학교 총장. 2008년 제3회 혜산 박두진 문학상, 2009년 제1회 한송문학상 수상.
목차 작가의 말_사랑에 나는 빚진 자입니다ㆍ004
1부- 푸르게, 불행은 날개를 단다
불편한 여자ㆍ012 누구의 잎으로 산다는 건 한 번도 내가 꽃피지 않는 것ㆍ018 빵은 시보다 접시를 깊게 포옹하고 있다ㆍ021 버티고Vertigoㆍ024 지울까, 지워질까다ㆍ028 쪼가ㆍ031 2013년 다음에 2015년이었으면 좋겠다ㆍ034 짐작은 가끔 맞지만 자주 틀린다ㆍ 042 너 정말 괜찮으냐고 물었다ㆍ044 그때는 정말 뿌리를 부르게 된다ㆍ047 배꽃과 총장ㆍ054 제 청춘은 왜 이리 희미합니까?ㆍ058 그것이 꽃구경이었을까?ㆍ063 슬프네, 슬프네 하면서……ㆍ066 푸른 고통ㆍ071 혹시 사랑이라 해도 사랑을 발굴하지 않았다ㆍ074 시의 발소리ㆍ076
2부 시는 비밀을 어떻게 품고 있는가?
유년ㆍ080 밤의 경험ㆍ086 시인들의 보는 법ㆍ095 말, 소리, 빛깔ㆍ098 시와 비밀ㆍ102 학생들에게 언제나 없는 세계를 가르쳤다ㆍ105 사과ㆍ108 옥수수ㆍ112 은초垠草ㆍ115 인간은 너무 많은 기억을 죽여왔다 ㆍ118 눈먼 자들의 회의ㆍ122 친구ㆍ126 페르소나Personaㆍ128 향ㆍ132 그대는 흙이니라ㆍ135 조장ㆍ138 0의 얼굴ㆍ142 보랏빛 공포ㆍ144 금요일ㆍ148
3부 나무는 죽을 때 슬픈 쪽으로 쓰러진다
허기는 언제나 위험하다ㆍ152 그날, 오래도록 옻나무밭에 서 있었다ㆍ154 5분ㆍ156 괴물ㆍ158 사과가 지구다ㆍ162 에미는 네 껍질이야ㆍ165 모두 곡선이었다ㆍ168 문ㆍ170 의자ㆍ173 연탄과 시인ㆍ176 나는 없겠네ㆍ179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는가?ㆍ182 나무가 손목을 끌어다 집에 데려다줄 것이다ㆍ185 나는 엄청 빚진 자였다ㆍ188 예스와 노 사이의 무수한 점ㆍ192 나무는 죽을 때 슬픈 쪽으로 쓰러진다ㆍ194 오늘은 시를 쓰려고 애쓰지 않았다ㆍ196
책 속으로누구의 잎으로 산다는 것은 마치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사는 것이다. 단 한 번도 나로 살지 않는 것이다. 얼마간 나도 누구의 잎처럼 산 적이 있다. 계절이 바뀌면 모두 내 얼굴을 바라봤다. 혹시 내가 나의 허공을 버리고 어딘가로 날아가지 않았을까 하고. _18쪽
꽃들은 꽃 한 송이 피지 않는 공허한 내 등뼈를 구경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이곳에 꽃이 없어졌을까. 언제부터 이곳에 이처럼 딱딱하고 굵은 슬픔 한 줄 그어져 있었을 까. 그동안 산맥과 구름 사이에 너무나 많은 꽃잎을 날렸 다. 어떤 슬픔인지도 모르는 그걸 멈추려고 거기다 너무 나 많은 못을 박았다. _64쪽
내가 치매에 걸린다면 불러도 오지 않는 말 몇 마디와 야생의 가지들이 비누로 지워질 것이다. 파랗 고 동그란 접시 같은 달 모양의 기억은 거울을 만들고, 사물들이 거울 속에서 나를 찾아낼 것이라고 믿는다. 끝 내는 라벤더꽃을 버리고 쫓아가겠지. 없어지는 것들과 함 께 공기를 휘저으며 자꾸 뒤돌아보다 자욱한 안개 들판 으로 사라질 것이다. 두고 온 도시는 모두 희미한 얼룩이 되고, 나를 기다리지 않는 쪽으로 나는 갈 것이다. _1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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