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중한 인생/이건순
이 책에 대하여
[나의 소중한 인생]은 이건순 여사님이 1995년부터 2012년 정초까지 18년 동안의 일기이며, 이 세상의 어머님들과 모든 불자들에게 바친 책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은 자비와 보시의 표상입니다. 이건순 여사님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비록, 가난하고 어렵지만, 더욱더 어렵고 가난한 이웃들에게 ‘사랑의 나눔운동’을 몸소 실천해 왔습니다. ‘성애 양로원의 무료봉사 활동’, ‘성훈 스님의 {마음의 등불} 1,000권 보시’, ‘신탄진역 시계탑 기증’, ‘지장보살상 제작 기증’, ‘어느 누구도 모르게 봉고차를 대절하여 불자들의 교통편리를 제공한 것’,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들에게 연탄과 쌀을 기부한 것’, ‘해마다의 방생과 전국 유명사찰의 순례’, ‘보현 불교대학의 수강과 유명 법사님들의 명강의 청강’ 등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이건순 여사님은 날이면 날마다 부처님께 기도를 드리며, 끊임없이 책을 읽고 공부를 하면서, 나의 행복과 우리 이웃들의 사랑과 평화와 행복의 전도사가 되어 왔던 것입니다.
이제 큰아들의 병도 상당히 호전되었고, 둘째 아들은 조계종으로 출가하여 법보 스님이 되었습니다. 막내딸은 훌륭한 신랑을 만나 1남 1녀의 어머니가 되었고, 간호학원의 원장님이 되었습니다. 이건순 여사님은 지난 수십 년간의 수난과 고통뿐이었던 삶을 ‘나의 소중한 인생’이라고 부르고, 이 세상의 삶을 더욱더 아름답고 행복한 삶이었다고 말합니다. {나의 소중한 인생]은 이건순 여사님이 피워낸 연꽃이며, 그 연꽃 속에는 ‘나의 아들 부처님’, 즉, 그의 두 아들이 살고 있습니다.
“나는 두 무릎을 꿇고 두 손 모아 아들 스님에게 감사합니다.
어지러운 세속에 물들지 않고 조용히 홀로 피어 있는 연꽃처럼, 청렴결백하고 인자하신 그 모습.”
표4의 글
어느덧 세월은 유수와도 같이 흐르고 흘러갔습니다. 참으로 빠르고 빠른 것이 이 세상의 세월이었고, 나는 어느덧 인생 70의 고희를 지나서 인생의 황혼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틈틈이 나의 소중한 인생을 회상해 보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단 한 번뿐인 삶을 정말로 감사한 마음으로 살다가 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냥 떠나기가 너무나도 섭섭하여 지난 1995년부터 틈틈이 일기를 써왔습니다. 나는 이 일기를 부끄럽고 보잘 것 없는 나의 조촐한 인생의 마지막 선물로 남겨두고 가고 싶었습니다.
----[나의 소중한 인생을 펴내면서]
정택이는 유난히 아버지를 미워하고 싫어한다. 아침부터 기분이 안 좋아 보이더니, 급기야 아무런 이유도 없이 아버지를 폭행한 것이다. 텔레비전에서나 볼 수 있었던 인륜을 저버리는 일이 우리 집안에서 일어나다니, 나는 그저 기가 막힐 뿐이었다. 아무리 정신병을 앓고 있는 환자라고 해도, 남편이 받은 충격과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파출소 아저씨들의 도움으로 정택이를 병원에 입원시켰다.
정택이는 이제 내 아들이 아니다. 이제는 정택이를 포기해 버리자.
사랑하는 자식을 포기해야만 하는 이 어미의 마음.......
---- 1997년 12월 15일
오후 3시쯤 내가 잠깐 집을 비운 사이에 정신분열 증세를 앓고 있는 정택이가 동네 아줌마를 아무 이유도 없이 발로 차며 마구 때린 것이었다. 나는 즉시 아줌마를 병원에 입원시키고, 정택이도 공주 국립정신병원에 다시 입원을 시켰다.
이제는 큰아들에게 온갖 정이 다 떨어지고 말았다. 그동안 정말 최선을 다해서 큰아들의 병을 고치려고 별의별 짓을 다하며 노력했는데, 이와 같은 상황을 당하고 나니 이제는 포기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것 같았다.
----2007년 4월 17일
어쩌면 나의 팔자가 이렇게 기구하단 말인가?
10여 년 동안 정택이 때문에 그처럼 쓰라린 고통을 겪어왔지만, 이제는 문식이마저도 나의 마음을 너무나 아프게 하는구나. 문식이는 대학원 석사 과정을 마치고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의 인턴연구원으로 취직을 했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이 달 말일까지만 근무하고 그만두라는 최종훈 박사의 전화를 받게 된 것이다. 6개월도 채우지 못하고 4개월 만에 해고를 당한 것이다.
----1999년 8월 25일
내 착한 아들 문식이가 행자교육을 무사히 마친 후, 사미계를 받고 승복을 입은 모습으로 집을 다녀갔다. 그 승복을 입기 위해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는 아들 법보 스님께 일 배의 절을 올리고, “고맙구나, 그저 고맙구나”라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결국 스님이라는 길을 가기 위해서 그렇게 많은 날들을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보냈으리라.
---2006년 9월 5일
비록 작은 아들이 출가를 했지만, 그래도 나는 아직 우리 집의 대들보와도 같은 자식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고행의 여정을 가야만 하는 스님의 길이라고는 하지만, 야윈 모습을 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이제 우리 스님은 송광사에서 4년간의 강원생활을 마치고, 통도사에서 8박9일 동안 비구계 교육을 받은 후, 고산 스님으로부터 구족계를 수지하고 정식 승려가 되었다고 한다.
참으로 장하다, 아들아!
---- 2011년 4월 3일
무료 성애 양로원.
소외받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들.
이 세상을 다 사시고 이제는 내생을 준비해야 할 노인 어른들에게 다소나마 도움이 되고자 나는 1994년 9월 달부터 자원봉사를 다니기 시작했다.
즐거움도 희망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시는 외로운 노인들!
기독교 재단인지라 나와는 종교가 다르다 보니 내가 노인 분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는 현실에 마음이 아프기만 하다. 만약 불교재단이라면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부처님의 지혜와 가르침을 성심성의껏 알려드리고 편안한 안식처로 인도해 드릴 수가 있었을 수도 있을 텐데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1995년 6월 6일:
나는 이렇게 <마음의 등불>이라는 책 1000권의 보시를 마치고 오늘은 서진불교원장님을 찾아뵈었다. 원장님께서는 두 손 모아 합장하시면서 그동안 수고 많이 했다는 찬사를 아끼지 않으시니, 나는 그저 감격하여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부처님! 나는 정말 너무 힘들었어요. 너무나 목이 타고 애가 탔어요.”
----1998년 4월 3일
2002년 임오년은 나의 회갑이기도 하다.
나는 회갑을 맞이하여 신탄진역에 탑시계를 보시했다.
봄부터 아무도 모르게 나 혼자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정말로 보람된 일일까 하고 연구하고 생각하다가, 230만원의 거액을 들여서 이 커다란 특수시계를 신탄진역에 보시하게 된 것이다.
누구와 이 기쁨을 나누면 좋을까?
오늘 나는 나의 가장 큰 소망중의 하나를 이루게 되었다.
신탄진역을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바라볼 수 있는 시계.......
나의 원력과 자비심이 담긴 이 둥근 시계는 이 세상이 다하도록 잠시도 쉬지 않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시간을 알려 줄 것이다.
--- 2002년 7월 7일:
오늘은 내 인생에 있어서 잊을 수 없는 날로 기억될 것이다.
‘아픈 만큼 성숙해 진다’는 말이 있던가. 아들 형제를 두고 그 모진 아픔 끝에 이제는 두 아들로 인하여 나는 많은 것을 배웠고, ‘나’라는 사람은 그로인해 이만큼 인품을 닦을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두 아들로 인하여 불법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고, 오늘과 같은 영광스러운 날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태고종의 한 암자에 열한 자의 지장보살 석불을 모시게 되었고, 드디어 오늘은 그 점안식을 거행하게 된 것이다.
“지장보살님은 보면 볼수록 아주 인자하고 멋져요.”
----2004년 7월 25일
나는 가양동에서 살다가 2년 전에 지금의 석교동으로 이사를 왔는데, 이곳에는 가까운 곳에 복전암이라는 절이 있어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그 절에 다니고 있는데, 하루는 복전암으로 올라가는 경사진 길을 오르기가 너무나 힘이 들어서 매월 정기법회날(음력7일)에 봉고차를 이용해 보살님들을 실어 나르기로 결심했고, 그 일을 시작한지 올해로 꼭 일 년이 되었다. 봉고차로 2시간가량 운행을 해 주는 사례금으로 7만원씩을 주고 있다.
아무도 모르게 무상보시를 일 년 동안 해오고 있었는데, 오늘은 주지 스님께서 어떻게 그 사실을 아시고 법회에서 발표를 하셨다.
----2008년 7월 9일
국민소득이 2만 달러 가까이 된다는 우리나라이지만,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매일매일 끼니 걱정을 하며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오늘은 이러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인 태평동의 한 할머니께 쌀 20kg을 사다 드리고 위로를 해 드렸다. 쌀을 받은 그 할머니께서 눈물을 흘리며 감사한 마음을 전해 오니, 나도 그저 고맙기만 했다.
진정으로 가치 있는 베품은 내가 여유 있을 때 하는 베품이 아니라, 작지만 어려운 가운데서도 할 수 있는 베품이 진정한 베품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2008년 7월 9일
보문산 관음암의 연화심 보살을 따라서 방생에 동참했다. 큰 언니도 함께 갔다.
--- 1996년 3월 15일
지금으로부터 약 1600년 전, 서기 418년에 세워진 직지사는 아주 오래되고 역사가 깊은 사찰이었다. 옛날 삼국 시대 때 쓰였던 유품들이 직지사의 박물관에는 고스란히 전시되어 있었고, 우리는 여기서 옛날 스님들의 생활모습과 그 당시 불교문화의 숨결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나는 전국의 사찰순례를 무척이나 많이 다녔지만, 직지사만큼 깨끗하고 아름다우며 규모가 큰 도량은 없는 듯 했다.
----2000년 7월 31일
오늘은 음력 오월 초하루.
중앙불교회관에서 경원 스님께서 주관하시는 법회가 있었다. 경원 스님께서는 무더운 날씨에도 장삼을 입으시고 법문을 하셨다.
얼마나 덥고 힘이 드실까? 어쩌면 그렇게도 훌륭하실까?
나는 법문하시는 내내 경원 스님을 존경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곳에서는 현재 하안거 백일 지장기도 중인데, 나도 신심과 원력을 발하여 지장보살님께 백팔배 절을 거뜬히 올리고 돌아왔다.
----1996년 6월 16일
예전부터 보현불교대학을 다니고 싶어 하던 차에, 드디어 5월 6일에 입학을 했고, 매주 수요일마다 수업을 받게 된다.
오늘은 ‘한국 불교사’라는 주제로 김방용 선생님의 강의를 듣게 되었다. 나는 2개월 늦게 들어갔지만, 1학년 학생으로 등록이 허락되어 2학년 학생들에게 처음으로 입학 인사를 드렸다.
이제 그토록 원하던 불교대학생이 되었으니, 저는 발원합니다. “부처님 법을 올곧게 배워 나를 성불의 길로 인도하고, 많은 중생들을 제도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비록 늦은 나이에 시작한 공부이지만,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하다.
----2003년 5월 14일:
저자 소개
이건순
이건순 여사님은 1942년 충남 공주군 의당면 용현리에서 평범한 농부의 셋째 딸로 태어났고, 1966년 유기준 선생님과 결혼하여, 슬하에 2남 1녀를 둔 평범한 할머니입니다. 이건순 여사님은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인 유기준 선생님과 매우 단란하고 행복한 신혼살림을 꾸렸지만, 그러나 이건순 여사님의 삶은 어느 누구보다도 더 어렵고 고통스러운 나날의 삶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큰아들은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었고, 둘째 아들은 내성적인 성격탓으로 대학원을 졸업하고도 사회적인 부적응자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건순 여사님은 큰아들과 작은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정법을 떠나 사도에 빠져보기도 했고, 그 어떠한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도서 출판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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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순 지음
2012년 12월 10일 초판 1쇄 발행
규격 : 신국판 150x210 mm 무선제책
정가 :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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