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술은 너무 슬퍼서 - 안원찬 시집
(시인동네 시인선 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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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시전(詩田)에서 화엄(華嚴)의 바다로
‘시 캐는 농부’로 알려진 안원찬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낮술은 너무 슬퍼서』가 시인동네 시인선 203으로 출간되었다. 안원찬에게 시 쓰는 행위가 ‘도피안’의 정수(精髓)라면 밭을 갈고, 차를 우리고, 꽃을 그리고, 장을 보고, 휘적휘적 내딛는 발걸음은 모두 시작의 밑바탕으로서 수행의 표지가 된다. 그렇게 안원찬 시인은 ‘시마(詩魔)’를 불러 놀다 이내 육근(六根)의 가려움을 털어내고 다시 도피안에 빠져들어 독자의 가슴속에 한 포기의 시를 심는다.
시인의 말
내 귓속에 뿌리내리고 사는 놈들,
아직 하나도 출가시키지 못했다.
소리를 받아들이는 귀가 도리어 소리를 내지르니
아무래도 치유가 필요할 듯하다.
‘출구를 잃어버린 소리들’은 잡음만 생산하고 있다.
내게 시를 쓰는 행위는
제 몸을 입지 못한 소리들을 복원하는 일이다.
오염되고 상처받고 부서진 소리들을 위해
나는 매일매일 출구를 닦아내고 있다.
2023년 5월
옥류산방에서 안원찬
해설 엿보기
살다 보면 그렇게 되어버리는 경우도 생긴다. 왜 아니겠는가? 비급(祕笈)으로 삼았던 최후의 내밀한 의지를 꺼내 휘둘러도 아랑곳하지 않는 상황에 부딪히기도 한다. 주체 혹은 역능(力能)으로서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과 상관없이 어떤 상황은 자신보다 상위의 존재를 가정하거나 초혼(招魂)이라도 하지 않으면 헤쳐 나가는 것은 고사하고 맞닥뜨리기도 어렵다. 결코, 바란 적도 없이 경계에 몰리거나 부지불식간에 그 근처에 물러서 있게 된다.
이번 시집을 통해 확인하게 되는 안원찬 시인의 이력은 대략 이렇다. 사십 년 도회지의 밥벌이 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고향 홍천으로 돌아와 봉화산 자락, 헌 집을 고쳐 ‘옥류산방’이라는 겸손한 당호(堂號)를 붙여 기거한다. 이제 일상은 “멧돼지처럼 산전과 산비탈에 엎드려/내 살 긁듯 벅벅 긁을 때마다/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건더기들/육근(六根)으로 발기시켜 수박씨 뱉듯 퉤퉤 뱉는”(「시 캐는 농부」) 자급자족을 위한 노동과 “밤에 만나는 것을 싫어하는 그녀는 주로/오전 싱싱 타임을 좋아한다/녹차 국화차 뽕잎차 감잎차 연잎차 쑥차/보이차 솔잎차 등속 우리고 우려진/맛과 향, 입술부터 녹여든다/속옷까지 흠뻑 젖도록 사랑을 확인”(「곡기 끊는 날」)하는 정갈한 풍류 도인의 면모가 섞여 있다.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치유가 필요한 몸의 상태를 언급하며 “시를 쓰는 행위는/제 몸을 입지 못한 소리들을 복원하는 일이다”라고 밝힌다. 어쩌면 귀향해서 맡게 된 ‘향토문화연구소장’이라는 직함을 다분히 염두에 둔 발언일 수도 있다. 시작(詩作)은 도회의 상처를 치료하는 행위이자 끊어졌던 고향과의 관계를 복원하는, 아니 태(胎)를 다시 잇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면모 중 밖으로 드러난 부분은 앞의 기술과 같다. 이주, 귀향, 경계 등 행위의 일반성을 규정하는 개념들로 충분하다. 시대가 선전하는 ‘인생 이모작’이라는 바람직한 생애의 전형과도 일견 맞닿아 있다. 하지만 ‘시인’이라는 존재의 특성을 결정하는 내면의 사태는 겉으로 드러나는 전형성과는 다른 방식으로 형성되고 구체화한다. 안원찬 시인도 마찬가지다.
텅 빈 봉화산
자식들 죄다 사문(死門) 너머로 출가시키고
바람에 매 맞던 육식(六識)
안으로 불러들여 묵언 중이다
마지막 달력 한 장 눈에 넣고
밀려간 물결의 흔적 헤아린다
덫에서 벗어난 바깥
춘분이다
― 「문턱」 전문
우선 ‘문턱’이 눈길을 잡아끈다. 개념상으로는 ‘경계’지만 실제에 닥쳐서는 ‘문턱’이다. 존재는 생사의 경계를 사유하지만, 생각으로 생사의 문턱을 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문턱은 이쪽에 있으면서 동시에 저쪽을 바라보는 행위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용어다. 인용 작품은 ‘봉화산’에서 시인의 현재를 드러내고, ‘사문(死門), 출가, 육식(六識), 묵언’ 등의 어휘를 통해 시인이 취하는 방법(불교적 수행)을 명시하면서 ‘흔적, 덫, 바깥, 춘분’이라는 시어를 동원해 현실 인식을 형성한다. 나아가 이 모든 배치의 끝에서 통합하면서 초월하는 의미로 ‘문턱’이라는 표제를 제시한다. 문턱은 경계이면서 통로이고 열어둘 수 있는 만큼 닫아걸 수도 있다. 어찌 보면 이 양가성(兩價性)이야말로 시인의 귀향이 함축한 진짜 세계의 성질이다.
― 백인덕(시인)
책 속에서
오래전, 벌건 대낮
누군가의 눈부신 눈물이었을 겁니다
벌 나비 햇살 끌고 와 바람 넣어도
얼굴만큼은 보여줄 수 없다고 절절 흔들어댈 겁니다
태양이 머리통 지글지글 달궈도
장대비가 사정없이 온몸 후려갈겨도
칭찬하는 바람 욕하는 바람 제멋대로 불어도
무럭무럭 동요되지 않을 겁니다
그저 묵묵히 몸만 지탱하다가
저녁노을 끌어 덮은 겨드랑이에서
노랑나비 같은 노오란 꽃 팍팍 피워댈 겁니다
지나는 구름들에게 방긋방긋 웃기만 할 뿐
외롭다 무섭다 하지 않습니다
그나저나 아픔 없이 피운 꽃이 어디 있겠습니까
꽃이란 또 얼마나 슬픈 벼랑입니까
절망해본 사람은 알 겁니다
두려움 가슴에 안고
잠 꼿꼿이 세운 채 기다리는
노란빛 숨결로 달님과 정겹다가도
날 새면 꼼짝없이 그리움에 묶여버린다는 것을
― 「달맞이꽃은 아침을 두려워하고」 전문
평상 위에 투두둑 둑,
검은 꽃 피우는 물꽃들의 애환
어쩌랴, 시마를 부를 수밖에
손가락 끝에 접신 되어도
언어는 바로 쏟아지지 않는다
폴더에 대기 중인 녀석들
하나하나 호명
육근에 접목되어 엉켜 있는 놈들의 뼈를 깎는다
복잡한 인생들 대기 라인에 세우고
가벼운 인생들 날이 밝아서야 집으로 돌아간다
다래와 머루 등속 솔바람 타고 와 새벽을 위로한다
그래도, 언어는 손가락 끝에 접신되지 않는다
새벽안개 짙으니
매미는 하릴없이 울어댈 것이고
오늘도 낮은 펄펄 끓을 것이다
― 「퇴고」 전문
질경이는 혁명의 전사다
버려진 땅을 자신의 영토로 개간하는
작고 여린 꽃
어머니의 심장 같다
질경이 닮은 사람들
스스로 길을 내는,
고달프지만 절대 영혼 꺾지 않는,
이 땅의 비주류들이다
오늘도 혁명 중이다
땅 파고 공장 돌리고 자동차 고치고
하수구 뚫고 빵 굽고 밥 짓고
똥 푸고,
그리고 또, 작고 여린 꽃을 피우는
이 땅의 질경이들
― 「비주류들」 전문
잿빛 소음 가득한 도심의 한복판에서
다 된 밥그릇 받아들고 강원도 홍천으로 귀향
겨울 볕 바르고 바람 얌전히 쉬어가는
봉화산 자락에 터 잡은 지 9년
멧돼지처럼 산전과 산비탈에 엎드려
내 살 긁듯 벅벅 긁을 때마다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건더기들
육근(六根)으로 발기시켜 수박씨 뱉듯 퉤퉤 뱉는다
밤, 대추, 고야, 머루, 두릅, 엄나무……
생에 얽힌 사연들 시마(詩魔)에 걸려
깜깜하게 언 땅 쨍쨍 풀리는 줄도 모르는
삼월이, 불쑥 찾아와 살갑게 달라붙어
일일일야(一日一夜)만이라도 동주하자고 강짜 부리는
네모나고 뾰족하고 맵고 쓰고 시고 짠
놈들, 끌어안은 팔만사천 톤의 감각
육경(六境)으로 버무려 시를 짓는다
문 밖 헛기침 소리 고요에 들고
댓돌에 걸터앉아 푸르게 출렁이는 달빛과 어우러진
그림자들의 맥박 소리로 지지는 된장찌개
보글보글 뿜어내는 시의 향기
쿵쾅쿵쾅 내 심장 뛰듯 바람 박차고
팔라당팔라당 여행을 떠난다
― 「시 캐는 농부」 전문
목화송이 같은 미소 무럭무럭 쏟아붓는,
고양이가 번개 치듯 눈송이 잡으려
소리 없이 버럭 눈 찢게 하는,
거기에다 오똘랑오똘랑 허공 찢어대는
누렁이에게 하이얀 숄 포근히 감싸주는,
산수유꽃 불두덩에도 살포시 내려앉아
새하얗게 웃어주는,
모닥불로 뛰어들어 장렬하게 전사하는,
봄과 봄의 반 뼘 사이에서
낮술은 너무 슬프다
― 「낮술은 너무 슬퍼서」 전문
시인의 산문
그동안 나는 내 속의 욕망과 나를 부추기는 욕망 사이에서 소진되어왔다. 나를 부르는 자연의 소리를 거부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고통과 외로움에 시달리다 홍천 긴밭들로 귀향하여 욕망의 고통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고통이란 이를테면 인생의 통과의례와 같은 것이었다. 물론 시를 쓰는 행위가 또 다른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지만, 그것은 내가 나 자신에게 부과한 것이기에 즐거운 고통이다. 고통으로 고통을 벗어나는 것, 세계를 하나하나 객관화하며 자연스럽게 나와 세계가 화해하고 조화를 이루게 되기를 희망한다.
작가 소개
안원찬 시인
강원 홍천에서 태어나 한신대학교 문예창작 대학원을 졸업했다. 2004년 시집 『지금 그곳은 정전이 아니다』를 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2006년 《오늘의문학》 신인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가슴에 이 가슴에』 『귀가 운다』 『거룩한 행자』가 있다. 현재 홍천문화원 부설 홍천학연구소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차례
제1부
붓을 갈다•13/집•14/경비원•15/곡기 끊는 날•16/수행•18/문턱•19/달맞이꽃은 아침을 두려워하고•20/유대(紐帶)•22/숲, 대화•23/송학정•24/소우(消憂)•26/봄은 방화범이다•27/바이러스 공동 무덤•28/녹차•30/사소한 일의 역사•31/퇴고•32/그리다•34
제2부
비주류들•37/시 캐는 농부•38/낯•40/어느새•41/검은 비닐봉지 같은•42/꽃병•44/자연•45/레이더•46/내가 나를 문병한다•48/나는 물고기다•49/구겨진 속도•50/선(禪)•52/꺾을 수 없는 꽃•53/표충등•54/가을 소리가 온다•56/어둠의 꽃들•57/죽음의 연구•58
제3부
나는 그가 아프다•61/다릿발이 삐걱삐걱 웃고 있다•62/새 붙이는 날•64/서울댁•65/밭 갈다 새끼 낳고, 또 밭 갈고•66/봄이다•68/봄나물•69/난곡마을•70/채송화•72/별로 태어나•73/강원도 홍천에서 토종 동백꽃 25년 만에 피다•74/헛,•76/풍경 1•77/팽창된 햇살 먹고 싶다•78/즐거운 뮤직 박스•80/넙치•81/물고기 노동자•82/달마중•84
제4부
낮술은 너무 슬퍼서•87/고인돌•88/아는가•89/고양이 눈빛 뜨겁다•90/애기집 들어내고부터•91/콘크리트 속에서•92/국제파 잡초•94/강낭콩, 깍지•95/원주 세브란스 기독병원에서•96/삭제 버튼•98/개망초•99/거미, 집•100/무궁화 테마파크•102/혼종 문화•103/길냥이 엄마•104/싸리나무 기둥•106/종족 번식•107/살아야겠다•108
해설 백인덕(시인)•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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