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고(苦), 난(難), 통(痛)의 여정(곂情)을 거치며 다시 머리 녹을 닦았다
2013년, ‘미주문학상’수상식에서 문단 선배이신 ‘무진기행’의 김승옥 선생님과 자리를 함께 한 적이 있었다. 그때 김승옥 선생도 스트록 후유증으로‘실어증(失語症)’에 걸려 있었다. 서로 메모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나는 근 30여 년 만에만난 그 분과의 회포를 가슴 속에 품고 울음을 삼켰다. 왜냐하면 당시 나 역시 스트록을 맞고 얼굴이 찌그러진 내 몰골도 서러웠지만, 나보다 김승옥 선생의 모습이 나보다 더 아팠기때문이었다. 그때 김승옥 선생은 날 더러‘ 자넨 언제 그랬어?’ 했다. 나 역시 어눌한 목소리로 “2009년… 죽을까 하다말고 그냥 머리 녹을 새로 닦았습니다”고 대꾸했다. 잠깐의 대화가 수화(手話) 반으로 이어졌다. 그분이 말했다. “잘했다.벙어리 된 나도 사는데, 팔다리 좀 불편타고 자빠지면 안되지. 버티며 앞으로 더 좋은 글 많이 써요. 지난 시절 너무 놀기만 했으니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거여. 나처럼…”그때 나는 김 선생의 눈시울도 잠시 붉어진 걸 놓치지 않고 지켜보며 많은 생각을 했었다.
나는 딱 50년 전 20대 약관에 단편「방생」으로 조선일보신춘문예 당선으로 소위 ‘문인’ 딱지를 얻었다. 허나 역마살 때문인지, 그후 꽤 이름 있던 기업에 입사해 근 20여 년을 해외로 나돌다 98년 미국에 정착했다. 그때가 지천명(知天命)의나이였다. 50대에 겪는 타향 생활은 ‘정착’의 의미보다는 새로운 고(苦)의 시작이었다. 다시 말해 이국(굋國)에서 겪는 이순(耳順)까지의 삶은 일반적‘정착’과는 거리가 먼 난(難)의 연속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한 10여 년 이민 현장에서 정신없이 삐대며 몸을 굴리다 하필이면 찾아든 것이 통(痛)이었다. 뇌졸증이었다. 몸의 한쪽이 망가진 것이었다. 당연히 좌절했고 잠시나마 자진(自盡)까지 생각했다. 그러다 생각을 바꾸었다. 좌절보다 인생의 업보였던 글을 택했다. 바로 문학에의 열정(熱情)이 나를 바꾸었다. 녹슨 머리를 헹구며, 당초 내 본전이었던 문학과의 끈질긴 애증 관계를 다시 끈으로 묶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소진하기 위해 『한솔문학』이라는 글로벌 문예지를 만들어 또 하나 여생의 반려라고 생각하고 온 힘을 쏟았다. 나같이 늘 노스탤지어에 젖어있는 해외 디아스포라 문인들과 호흡을 함께 하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신이 주저앉힌 몸뚱어리를 마치 노병(老兵)의 자세로 겸손하게, 하지만 헛되지 않게 남은 인생을 마무리하고 싶어서였다.
인생은 어차피 생과 죽음의 여정이기에, 내가 꿈꾸는 것은 몸속에서 다 소진하고 귀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모르긴 해도 그때 김승옥 선생의 짧은 격려가 없었다면, 아마 나는 다시 좌절했을 지도 모른다. 당시 나는 사실 심신이 지쳐가며 위태한 나날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머리에 낀 녹을 닦고’긴 세월 소홀했던‘쓰기 작업’에 매달리면서그런 자격지심은 많이 없어졌다. 잡생각을 뿌리치고, 그 후 나는 실성한 듯 내 속에 꿍쳐 두었던 피안의 기억들을 더듬어 실꾸리 풀 듯 새로이 풀고 엮어갔다. 그런 미친(?) 덕분에 나는 10년 만에 20여 권(전자책 포함)의 책을 그나마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다.
새삼 손가락을 꼽아보니 올해가 내게 희수(喜壽)였다. 미국에 사니 미국 나이로 그렇다. 아무튼 사람의 나이테를 100년으로 치면 7할 7푼이었다. 굳이 따지면 C+다. 잘한 것도 없고 별로 모자라지도 않는… 지금이 그런 범생(凡生)의 위치였다. 하지만 나는 소위 출세(사회에 나오는 것)를 하고 나서 최소한 B+ 정도는 되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냐고… 늘 그리 생각하고 살았다. ‘내 삶’의 기준을 최소한 B+를 지향하고살았다는 얘기다. 헌데… 돌아보면 내가 살아온 성적은 솔직히 세속 나이의 7할 7푼도 안 되었다. 그저 잘 봐서 C 이븐 정도가 아니었나 싶다. 그것도 다행히 내 가족들이 다소 모자란 칠푼이 가장(家長)을 그런 대로 받아 주고 잘 챙겨줘서 오늘이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내 아내와 아이들에게 많이 고맙고, 한편은 부끄럽지만 그 덕에 나름대로는 평정을 되찾았다. 돌이켜보면 본향(本鄕)떠난지 4반세기다. 앞서 말했듯 그사이 우여곡절도 많았고 이렇듯 고(苦)와 난(難)과 통(痛)의 여정(旅程)을 골고루 거쳤다. 그래도 세월은 흘렀고 나이도 칠십 중반이 넘었다. 몸은 병들고 기력도 빠졌지만, 그래도 집에서 지천 받지 않고 혼자서 똥오줌 잘 가리고 컴퓨터 앞에 앉아서 먼 곳의 그리운 동무들 소식을 서로 나눌 수 있으니 행복하다.
행복이 뭐 별거냐? 글도 쓰고 책도 읽고… 그리고 오늘처럼 시집이라도 묶어 주변의 좋은 친구, 동무들에게 나눠줄 수 있으니, 그게 바로 ‘행복’이 아닐까? 이번의 시집은 명색이 내가 종이책으로 만든 13번째다, 시집으로는 3번째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등단 50주년 및 내 희수 기념(?)집으로 다른 소설집과 함께 쌍둥이로 태어난다. 내용은 주로 그동안 국내외 문예지 등에서 발표되었던 기존의 작품들과 새 자식들과 더불었다. 특히 시집은 새 자식들이 반 이상을 넘는다. 책이 나와 독자들이 내 소설과 운문을 대하고 엄지 척을 해주든 중지를 세워 ‘엿’을 먹이든 모두가 읽는 사람들의 몫이다. 별로 신경은 안 쓰지만, 그래도 아직 나는 배가 고프다. 만약 하느님이 앞으로 내 명(命)을 조금 더 허락하신다면, 쓰다 말았던 두어 편의 장편소설과 그리고 참 멋진 운문집 두어 권도 더 만든 후에 돌아갔으면 좋겠다. 그래야만 당초의 생각대로 내 인생 스스로 B+ 정도는 되지 않겠나 생각이 들어서이다. 끝으로 이번 2023년 계간 ‘시선’ 시문학상에 해외부문 시 대상을 주시고 그 선물로 이 시집을 만들어주신 ‘시선’ 심사위원님들과 발행인 정공량 시인에게 큰 감사를 드린다.
2023년 3월손용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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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경남 밀양 출생, 경동고, 고려대 사회학과 졸업,『조선일보』신춘문예 소설‘방생’당선(1973)으로등단,1998년 도미,장·단편 소설집『그대 속의 타인』『코메리칸의 뒤안길』『꿈꾸는 목련』『따라지의 꿈』『토무(土舞/원시의 춤)』『파도야 어쩌란 말이냐』외,에세이 칼럼집『우리가 사는 이유』『인생역전. 그 한방을 꿈꾼다』외,시집『천치(天癡), 시간을 잃은』『부르지 못한 노래…허재비도 잠 깨우고』등,전자책 포함저서 약 20여 권,미주문학상·고원문학상·재외동포문학상(시부문)·미주카톨릭문학상·해외한국소설문학상·미주윤동주문학상 외 국내외 수상 경력 다수,현 글로벌 한미종합문예지『한솔문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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